여기 시선과 멈춤의 집교토│담양│정양권 내 속에 내가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아 내가 사라져 버렸을 때. 소음으로부터 잠시 떠나 작은 프레임 속 침묵의 공간에 머문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곳- 옛 정원의 가장 오래된 정자. 아름다운 풍경 속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지은 공간에 잠시 기대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돌아본다. 두 개의 정원, 담양의 소쇄원과 교토의 료안지 돌정원이다. 속도의 반성 대나무밭, 두 개의 기와집, 하나의 초가집, 작은 개울가, 가느다란 나무다리, 그리고 제법 묵직한 돌계단. 한 바퀴 돌면 10분. 조그맣다. 그렇게 썩 예쁜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소쇄원의 첫 느낌이었다. 2009 광주디자인비엔날레를 필두로, 여러 매스컴을 한 번에 타버린 탓일까. 방송에 속아, 맛집 아닌 맛집에 기대만 부푼 불쌍한 소비자가 품은 피해망상이란 이런 걸까 싶었다. 이제는 너무 이름만 유명해져 버렸나? 그 작고 아담한 공간 속을 기웃거리며 하염없이 돌아다녔더랬다. 돌고 돌아, 보고 또 봤다고 생각했을 때쯤, 조금 허탈한 마음으로 소쇄원을 떠났다. 이상하게도, 작은 숙제 하나를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련이 없었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겠거니. 그 뒤 시간이 한참 걸렸다, 진짜 소쇄원을 발견하기까지는. 내가 지금껏 보았던 것들이 왜곡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왠지 모를 마음에 이끌려 그곳을 다시 찾았다. 수 미터를 가로 지르는 커다란 대문을 넘어, 따뜻한 바람의 소리가 내민 손을 잡고 길을 따라 선다. 흐르는 물을 건너, 굵다란 나무기둥들이 만든 프레임 속 매끄럽게 다듬어진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본다. 공간에서의 삶. 시선의 여행. 정원의 외관에서 삶으로 들어오자, 눈이 짠하고 마주친다. 소쇄원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작 정원이 아니라 이 정원이 놓은 공간과 그 건너, 삶에 대한 일종의 반성 같은 것이 필요했다. 공기가 내게 말을 걸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실, 진짜 여행이란,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니라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벗어나라는 말이었는지 몰라.눈에 보여지는 여행이 아니라,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여행을 하며 사는. 그동안 효율적인 삶을 교육받아왔고, 때론 강요당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가능한 더 빠르게, 가능한 더 많이, 질이 안 되면 양이라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효율적인 삶과 속도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방향을 쉽게 잃었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그래서 속이 비어버린 사람. 깊이가 없는 껍데기를 부여잡고 울 수밖에 없었다. 내 여행의 동력은 그런 결핍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지구별을 수년간 몸으로 읽었다. 1년에 40개국에 가까운 나라를 다닌 적도 있었다. 방향을 찾고 싶은 절박함 때문이었지만 그 역시 욕심인 걸 깨달았다. 그 뒤 조금씩 여행이 달라졌다. 1달에 1개국. 3달에 1개국. 1년에 1개국으로 말이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모로코에서 한 달 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어린왕자」 팬인 내게 로망과 같았던 사하라사막, 수천 개의 골목이 만들어낸 그림 같은 페즈, 아프리카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쉐프샤우엔 등 형형색색 이름만 들어도 걸출한 도시들을 뒤로하고, 모로코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은 성터 위에서 그저 한없이 지중해를 바라본 1주일간의 시간이었다. 가벼운 도시락을 챙겨, 일출부터 일몰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자신과의 대화. 고요한 자연과의 대화. 속도를 늦추자 여행은 비로소 안으로 깊어졌다. 다시 정원 이야기로 돌아오자. 소쇄원은 그저 스쳐 지나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공간이다. 마치 나의 지난 여행이 그랬던 것처럼, 걸음과 삶을 한없이 늦추고 느리게 머무를 때만이 한 켠에 묻어둔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주는 곳이다. 바쁜 삶의 반성을 담보하고 고운 흙먼지에 감춰진 그림과 시와 오래된 건축, 옛 사람들의 시선과 사연이 말을 걸어온다. 그 다음의 시선 자세히 보면, 오랫동안 보면 다 보이는 줄 믿었던 제법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다. 처마 위 잡신 상들의 개수를 세며, 암키와와 수키와의 맞물림을 계산하며, 자연석과 인공미 사이 균형을 가늠하는 그랭이 공법을 운운하며 그저 자세히만 보던 시절. 그러나 선조들이 남긴 건축물의 미학은 구조나 형태가 아니라 그 건축물을 통해 어떤 삶을 살고자 했는가에 있다. 소쇄원의 건축도 마찬가지. 그들은 이 공간 자체가 시선을 독차지 하는 일이 없도록 설계했다. 인공물에 시선을 가두지 않고, 자연에 더 오래 시선이 머물도록 계획한 것이다. 솔직히 우리나라 건축물 껍데기만으로 세계 다른 유명 건물들과 승부를 보기엔 뒤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건축물은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날수록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이들이 사람의 시선 한복판에 서도록 지어진 게 아니라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위대한 자연을 그 중심에 들이도록 만들어진 이유다. 대나무가 내는 시원한 소리가 듣기 좋은 거리. 황금비의 낙수 차가 주는 배경음악. 높지 않은 언덕배기에서 내려보는 포근한 시선. 연일 빛이 그려주는 천상의 화폭. 비와 눈을 막아주되 시선을 가리지 않는 크지 않은 처마. 사계절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 수 있게 배려한 시원한 마루와 따뜻한 사랑방까지. 진짜의 눈. 시선의 이동. 소쇄원을 비롯해 우리 옛 정원의 해석은 그 너머에 뿌리내리고 있는 삶과 자연에 대한 시선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곳에서 산천과 바다가 빙빙 둘러, 사이사이 크고 작은 강줄기가 만든 사계의 창을 따라 우리의 시선은 여행을 한다. 선조들이 이 안에 담았던 건 화려한 구조나 압도적인 형태가 아니라, 시선이자 지혜이며, 문화이자 정신. 껍데기를 오래 본다고 알게 되는 게 아니었다. 힌트가 답인 줄 알고 지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자연의 복제와 합성만을 시도한다면원시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이며,자연을 건축물로 가리운다면오만과 착각에 빠졌다는 뜻이다.자연을 드러내는 건축을 이해할 때 비로소우리는 정답에 가까워 진다. 전혀 새로운 자연 한 다리를 건너 위치한 동쪽나라의 끝 교토에 왔다. 일본인들이 자연을 해석하는 방법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세상을 블록으로, 픽셀로 잘게 쪼개어 놓았다. 모스부호로 움직이는 파도를 그려 놓았고, 꿈쩍도 않을 멋스런 산을 여러 개 훔쳐 옮겨 놓았으며, 초목이 우거진 기름진 땅을 빌려 왔다. 편집된 이미지 속 바위, 자갈, 돌은 단정하고 미니멀하다. 또 그 안에는 과감한 생략과 함축을 담고 있다. 여기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된 자연이다. 일종의 편집본인 셈. 우리의 방식과 단순 비교해서 무엇이 우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시선의 차이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일본의 시선에는 무엇보다 자연을 해석하는 주인공이 매우 강렬하게 드러난다. 마치, 거대한 자연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먹기 좋게 뼈를 발라서 맛깔 나게 초벌구이를 한 셈이다. 이 편집본이 만든 생략과 함축, 은유는 오히려 상상의 지평을 더 넓게 열어 주었다. 인상파의 거장 모네는 일본 정원에 매료되어 직접 일본식 정원을 가꿔 평생 사랑하고 아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와 르코르뷔제는 일본 정원을 보며 두 손을 들어 찬양했다고 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다. 마치, 창세기가 아닌, 미켈란젤로의 작품 '아담의 창조'에서 영감을 받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ET의 손가락 키스가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중국이 원림으로 문제를 냈다면,일본은 석원으로 힌트를 주었고,한국이 시선으로 답을 공개했다. 료안지(龍安寺)의 돌정원. 사람들은 이곳에 앉아 숱한 함축과 은유를 저마다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큐와 판타지의 경계에 서서 자기 자신을 독대하는 사람, 과거의 일과 생각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신중히 연결해 보는 사람, 눈앞에 보이는 자연의 편집본을 토대 삼아 마음의 풍경을 손에 옮겨 담는 사람. 료안지가 건네는 것은 삶과 자연, 인생의 방향과 속도에 관한 작디 작은 힌트일 뿐인데 사람들의 내적 대화는 깊고 풍성하다. 내가 최초에 이 공간을 기획하고 꾸린 사람들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록 방식은 달랐지만 자연을 몇 문장으로 압축해서 읊어주기까지 그 이면에 자연과 인간, 삶에 대한 우리와 같은 숱한 고민과 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정원 속 이미 죽은 지은이들과의 대화. 이 대화는 풍요롭고 고요하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누구도 수다쟁이는 없었다. 한국의 정원과 일본의 정원에는 선조들이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우리에게 남긴 자연과 삶에 대한 고유한 시선이 담겨있다. 청수사 뒷마당에서 한참 그 시선을 붙잡고 나는 서있다. 글│정양권사진│정양권 artravel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