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ILLUSION

WHITE ILLUSION아이슬란드&노르웨이, 양정훈 백야, 라고 낮게 발음하면 무언가 마음에서 툭 떨어져 내리는 게 있다. 묘하다. 백야에 관해 이미 몇 번의 글을 썼다. 이제야 비밀 하나를 털어놓자면, 그곳에 관해 쓴 글들에 나는 일부러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놓았다. 눈부신 자정의 노을이나, 그 노을을 향해 한참 자전거를 달려가는 한밤의 소년들, 혹은 백야를 즐기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청년들의 이야기로 덧칠했지만. 사실 백야라는 말 앞에서 툭 떨어져 내리는 내 애틋한 마음의 절반은. 적어도 그 정도는. 어떤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중이었다. 감정을 강조하는 몹시, 대단히, 매우 같은 부사를 앞에 끼워 넣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딱 이 정도의 말이 적당하겠다. '좋아한다.' 붕 떠다니는 간절함이나 애착, 기대, 충동 같은 감정들이 다 가라앉고 그제서 보이는 것이 비로소 내 마음의 맨얼굴이다. 낯설고 해가 지지 않는 곳에서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좋아한다, 정도면 충분하다. 밤새 하늘이 푸르게 빛나는 장면을 같이 봤다. 그 사람의 발걸음, 말투, 귓불의 생김새, 삐뚤빼뚤 아주 못생긴 글씨까지 함께 빛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알았다. 이건 진짜가 아니다. 신기루. 고작 잠시 이곳을 다니러 온 여행자에게 짧아도 한참 짧은 꿈. 겁이 많은 나는, 또 내게 조금도 걸릴 것이 없는 당신은 곧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일상을 꾸릴 거다. 그곳에 우리는 없다. 금세 서로에게 잊혀질 마음. 백야는, 당신은, 이 마음은 고작 신기루. 내 잠깐의 마음을 무언가 대단한 것처럼 포장해서 이곳에 쓰려는 것은 아니다. 백야가 무슨 어마어마한 대자연의 환상인 듯 과장해서 쓰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대신, 신기루 같은 그 시간에 얽힌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선 조금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북극의 파리, 트롬쇠 북극권에서 네 번의 계절을 보내며 내가 만났던 풍경이란 제법 낯선 것이었다. 특히 고향과는 다른 빛의 시간들이 새롭고 놀라웠다. 물론 가장 유명한 건 오로라겠으나,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넘어가자. 아무래도 여름 동안 북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백야는 여행자들에게 꽤 알려져 있는 현상이다. 백야가 오면 자정이 지나 새벽이 되어서야 노을이 지고, 잠시 후면 다시 여명이 밝아온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숨지 않고 살짝 스쳤다가 떠오르는 것. 거의 24시간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말 그대도 하얀 밤이 여름을 밝힌다. 고작 한두 시간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긴 노을과 일출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세상의 바깥에 도착에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았다. 상하로 길게 뻗어있는 노르웨이 땅 안에서도 여기는 북쪽 끝에 위치한 섬. 트롬쇠(Tromsø)라는 이름의 이 마을로부터 위쪽은 지구의 북극에 속한다. 그래서 북극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진 곳. 섬 건너편 대륙에 위치한 스톨스티넨 전망대에 올라 트롬쇠를 바라보면 왜 이곳이 북극의 파리여야 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섬이라고 하지만 대륙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우리나라로 치면 강화도 정도. 북극권에 속하다 보니 겨울이 긴 반면, 섬을 감싸고 흐르는 멕시코 난류 덕에 한겨울에도 많이 춥지 않고 기후가 비교적 온화하다. 트롬쇠는 오로라를 찾아나선 여행자들에게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당장 섬 가운데 공항이 있어 유럽 어디에서도 이동이 자유롭고, 난류 덕에 온몸을 벌벌 떨면서 혹독한 추위 속에 헤매야 하는 대가를 상대적으로 덜 치른다. 대신 눈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오는데, 섬을 관통하는 도로들이 거대한 지하터널로 연결되어 있고, 주민들이 노르딕 스키를 타며 직장이나 학교에 가는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겨울이 깊으면 해가 지평선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곳. 이 때를 사람들은 극야라고 불렀다. 아침과 정오와 오후가 모두 캄캄한 세상이다. 트롬쇠의 백야는 이런 극야의 대칭점 위에 존재한다. 길고 긴 겨울 동안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또 간절하게 태양의 시간을 기다렸을까. 깊고 고요한 침묵의 밤을 건너왔으니, 백야를 대하는 트롬쇠 사람들의 애틋함과 애착은 아마도 당연한 것이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밖으로 나와 태양에게 자신의 모든 시간을 내어준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하루 종일 산책을 하고, 숲을 헤매고, 간단히 도시락을 챙겨 긴 하이킹을 떠난다. 분명하게 눈에 띌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야 동안 태양 아래를 떠나지 않는 것. 하다 못해 집 앞에 의자라도 갖다 두고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다. 사람들은 여름동안 햇빛을 마음속에 저장하려는 거야. 그리고 그 기억으로 겨울을 살지. 함께 생활했던 노르웨이 친구가 들려준 말이다. 머잖아 물러갈 여름의 날들. 곧이어 다가올 길고 막막한 겨울에 비하면 짧아도 너무 짧은 한 줌의 시간. 그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가진 전부로 이 기억을 품고, 그 애틋함으로 겨울 내내 삶을 태우면 된다. 레이캬비크 유희 나는 김동영 작가의 산문집 「나만 위로할 것」을 통해 아이슬란드를 처음 알았다. 책은 그의 전작에 비해 조금 따분했지만, 이곳에서 그가 찍었다는 사진들만큼은 숨이 가쁠 만큼 강렬했다. 저곳에 가야겠다. 때마침 고래보호 캠페인을 진행하는 기관이 있어서 여행 겸 프로젝트 활동을 위해 짐을 쌌다. 보름이 넘게 거의 매일 레이캬비크를 헤매고 다녔다. 골목과 바다가 만나는 끝에는 아련하게 북극해가 있었고, 밤이 깊으면 잠시 지는 해가 거리를 내려다봤다. 로이가베구르 어딘가 서서 멀리 바라보는 풍경마다 광막한 화산의 절벽들이 서있다. 첫눈에는 그저 커다란 협곡으로만 보이지만 실은 수만 년 동안 불을 품고 이룬 풍경이다. 산정상에는 1년 내 녹지 않은 만년설이 덮여 있고, 그 앞에 북극해에는 아이슬란드 어부들의 생업을 잇는 고깃배와 여행자들을 위한 고래구경 배가 떠다닌다. 그의 이름은 피터였던 것 같다. 내 커피를 한참 바라보더니 피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이곳에 여행왔어?" 난 살짝 경계심을 갖고 짧게 대답했다. "응!" 이후,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어지는 녀석의 본론. "나도 백야를 즐기러 왔어. 그러고 보면 우린 친구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커피 나랑 좀 나눠 마실래? 우린 친구잖아." 맙소사, 이게 피터의 본심이었다. 녀석뿐만 아니다. 초밥을 먹고 있으면 하나 달라는 녀석, 맥주를 나눠 마시자는 녀석 등. 한여름 레이캬비크(Reykjavik)의 진풍경이다. 피터의 곱슬머리 금발 여기저기에 물감이 잔뜩 묻어있다. 얼굴에도 온통 물감 천지. 손을 씻은 게 언제인지, 머리를 감은 건 또 언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꾀죄죄한 몰골. 어젯밤에는 술을 또 얼마나 마셨는지 푸른 눈이 얼핏 흐렸다. 영국에서 여름을 위해 아이슬란드로 건너온 29살의 사내(맞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다). 오직 백야를 만끽하고 싶어서 한 달간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가 하는 일은 수도 레이캬비크 한복판에 있는 그라피티 공원의 벽마다 잔뜩 내키는 대로 그라피티를 그려 넣는 것. 잠은 버려진 창고나 텐트에서 잔다. 백야가 찾아오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이 공원에 몰려든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대충 열흘쯤 렌터카를 빌려 아이슬란드 링로드를 일주하기 위해 잠시 들른 여행자가 아니다. 지칠 때까지 웃고, 길가는 누구라도 친구를 만들고, 파티를 즐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청춘을 맘껏 낭비하기 위해 모인 이들. 지지 않을 것처럼 자신만의 유희에 흠뻑 빠진 예술가 들. 저마다 온몸으로 이 짧고 짧은 여름을 살고 있다. 눈부신 흰 밤의 찰나를, 고작 신기루 같은 이 시간을 영원처럼 갖게 되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내 자리도, 내 일상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억을 꺼내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빛나는 한 철의 기억이 갖는 그 힘으로 다시 차근차근 살아갈 일이다. 무지개를 찾아 피오르(fjord)를 떠도는 여행자가 있었다. 누군가 물었다.당신이 찾는 것은 이제 곧 사라질 것들. 왜 그걸 찾아 헤매나요? 여행자가 답했다.그것은 영원하지 않지만 저를 숨 막히도록 행복하게 합니다.모두가 어딘가에 닿으려고 짐을 싸고 길을 떠나는 그때, 인생은 가장 빨리 결승점에 닿아야 하는 마라톤이라고 모두가 삶을 오해하던 무기력한 시절에 고작 무지개를 찾겠다고 길을 늦추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믿기 어렵겠지만 당신이 찾지 못했던 그 모든 해답의 시작이었다. - 「북유럽은 행복하다」 중에서 글 | 양정훈사진 | 양정훈 artravel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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