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 춤추고, 맞으라

깨어나, 춤추고, 맞으라쿠스코, 페루, 태원 페루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도시 쿠스코. 마추픽추라는 흥행 보증수표를 가진 덕에 범위를 남미 전체로 넓혀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쿠스코는 한 때 남미에서 가장 강성했던 잉카제국의 수도이자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런 이유로 쿠스코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잉카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찬란했던 과거의 영화를 잊지 않기 위해 열리는 태양의 축제 '인티 라이미(Inti Raymi)'. 축제보다 먼저 그분이 오셨다 일정상 다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로지 인티 라이미를 보고자 하는 마음에 벼락치기하듯 아슬아슬하게 축제 하루 전 날인 6월 23일 쿠스코에 도착했다. 쿠스코 공항에 도착하자 잉카 제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네댓 명의 현지인들이 입국 게이트에서 춤을 추며 축제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관광객에게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나도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으나 그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누군가가 어깨에 걸터앉아 정수리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 까닭이었다. 아, 이런! 우려는 했다만 벌써 그분이 오셨구나! 예방법도 없고 치료법도 없다는 고산병이 순식간에 후두부를 강타했다. 백두산보다 650미터나 더 높은3,400m에 위치한 고산도시 쿠스코에선 천하장사라도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이번 여정은 고산병의 울렁거림과 함께 시작됐다. 고통의 강도를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택시에 오름과 동시에 머리를 무릎 사이에 처박은 채 우스꽝스러운 꼴로 쿠스코 시내로 향했다. 안 그래도 목구멍으로 역류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기내식 샌드위치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이놈의 택시는 왜 이렇게 자꾸 갔다 섰다를 반복하는 건지. 차가 멈출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쿠스코 시내는 이미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을 만큼 극심하게 붐비고 있었다. 황당할 정도로 많은 인파를 마주하자 설상가상으로 딸꾹질까지 나기 시작했다. 겨우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토악질을 하고 나서야 몸이 진정세로 접어들었지만 정신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고산병이 의심되면 무조건 쉬어 야해요!" 숙소 주인이 만류했지만 저 밖에 축제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쉰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축제 일정에 맞춰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왔는데 이까짓(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서운) 고산병에 쓰러져 골골거리다 축제를 놓칠 순 없었다. 게다가 스치지 않았다면 모를까 택시 안에서 슬금슬금 훔쳐본 축제의 현장이 워낙 화려했기에 결국 전야제의 중심이 되는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했다. 화려한 전야제 인티 라이미는 내일이었지만 쿠스코엔 이미 거대한 축제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숙소를 나와 첫 번째 골목에 들어서자 원색의 전통의상을 입은 원주민들이 소라껍데기로 만든 피리를 불며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눈대중으로도 백 명은 넘어 보였다. 좁은 골목을 뚫고 제법 큰 거리에 들어서자 단위가 천 명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위해 대기 중인 원주민들과 행사를 통제하기 위해 배치된 경찰과 안전요원, 그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광장으로 가고자 몸부림치는 나와 같은 관광객들과 축제로 대목 좀 보려는 행상인들이 뒤엉켜 난리도 아니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고산병에 죽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젠 넘어졌다간 압사로 죽겠구나, 라는 걱정이 앞섰다. 종종걸음으로 밀리고 밀려 겨우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서니 대규모 퍼레이드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쿠스코 원주민뿐 아니라 과테말라와 콜롬비아에 흩어져 있던 잉카의 후손들까지 쿠소코로 몰려들어 춤과 노래를 섞어 힘차게 전진 중이었다. 느닷없이 은행 강도들이 쓸 법한 섬뜩한 복면을 한 사내들이 나타났다. 다행히 그들은 권총 대신 잉카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흔들었다. 이어서 멋진 중절모와 붉은 망토를 쓴 신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왁자지껄한 축제 풍경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점잔을 떨며 품위 있게 행진을 했다. 앞선 팀과 너무도 극명한 대비가 되는 다음 팀은 길쭉한 코를 부각시킨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쓴 남성들의 행렬. 죄다 쿠스코의 대표 맥주 '쿠스케냐'를 병나발 불며 등장했고 그 곁에선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겅중겅중 뛰며 장단을 맞추다가 남성들을 희롱했다. 굳이 따지자면 바로 요 팀이 내 스타일이었다. 퍼레이드는 쭈그려 앉은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십 수개의 팀이 광장을 빙빙 돈 뒤 큰길로 빠져나가면 또 다른 팀이 익살맞고 흥겨운 행진을 이어갔다. 넋을 잃고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무시무시했던 고산병도 저무는 태양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전야제에서 몸도 풀고 보너스로 고산병도 물리쳤으니 이제 내일 열릴 축제를 신나게 즐길 일만 남았다. 엄청난 인파 쿠스코 지역의 원주민인 케추아(Quechua)족의 언어로 인티(Inti)는 '태양', 라이미(Raymi)는 '축제'를 뜻한다. 말 그대로 태양의 축제라는 뜻. 잉카인들은 태양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 믿었고 그런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며 제물을 바치고 그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런 풍습이 현재의 인티 라이미 축제의 시초가 된 것이다 . 다소 흐릴 거라는 예보를 깨고 축제의 주인공인 태양이 제대로 대접을 받겠다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어제 전야제를 보며 충분히 예상했지만 축제 당일, 쿠스코로 꾸역꾸역 유입된 인파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인티 라이미를 찾는 관광객의 수가 30만에 달한다는 자료를 보며 '에이, 설마!'하고 피식 웃었는데 도착해보니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밖에. 아르마스 광장에서 인티 라이미 식전행사가 시작되는 코리칸차(Qorikancha) 신전까지 이어지는 도로엔 엄청난 인파가 거대한 강이 돼 흐르고 있었다. 인산인해라는 표현이 시답잖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행렬로 인해 도시 전체에 극심한 정체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특히 축제 당일에 맞춰 세계 각국에서 도착한 관광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당장 쿠스코에서 올림픽을 열어도 될 것 같았다. 자릿세까지 줘가며 코리칸차가 잘 보이는 명당을 구한 뒤 숨을 돌리는 순간,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청아한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건한 식전행사 코리칸차 앞의 너른 잔디밭 위로 잉카의 전사들이 줄지어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창과 방패를 들고 있지만 재미있게도 갑옷이 아닌 화려한 잉카의 문양이 새겨진 알록달록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각기 다른 의상을 입은 부대가 열을 맞춰 코리칸차 앞 잔디밭을 뒤덮자 이번엔 신전 앞에 세워진 석벽 위로 엄청난 수의 여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30-40명 정도가 한 그룹이 돼 차례로 등장하는데 각 그룹마다 의상과 액세서리, 머리 스타일이 모두 달라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감탄사가 줄줄 튀어나왔다. 저토록 정교한 의상을 만들고 완벽한 분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까! 감탄은 이내 존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어서 전통악기를 든 대규모 악단이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을 차근차근 채워나갔다. 역시나 그 숫자가 놀라울 수준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제 자리를 찾고 준비를 마치자 드디어 신전 가장 높은 곳에 황금도끼를 든 잉카제국의 왕이 등장해 케추아어로 차분하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왕이 움직일 때마다 태양빛을 머금은 황금도끼가 번쩍였다. 코리칸차 주변을 꽉 채운 구경꾼들은 그 모습을 보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악단이 전통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흥겨울 거라 생각했던 음악은 의외로 구슬펐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구슬픈 선율에 맞춰 가벼운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부르자 이내 잔디밭을 덮었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바꿔가며 기묘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모든 인물들이 수백 년 전, 잉카를 남미 최고의 제국으로 이끌던 주인공이 돼 춤과 노래를 태양신에 바치기 시작한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차근차근 번져나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마치 주변이 잉카제국의 전성시대로 서서히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나와 같은 체험을 했는지 환호성을 지르던 관광객들도 숨을 죽이고 타임머신에 올라탔다. 눈앞에서 잉카의 전사들이 으르렁거렸고 잉카의 여인들이 아름다운 군무를 뽐냈다. 그렇게 잉카의 후예들은 30여 분간 경건한 의식을 이어갔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왁자지껄했던 전야제에 비해 너무 차분해 흥이 나진 않았지만 이건 단지 축제의 시작일 뿐이었다. 깨어나라, 잉카의 후예여 신성한 의식을 마친 잉카의 후예들은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 잉카의 석벽 유적인 삭사이우아만(Sacsayhuaman)이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관람객들도 땀을 뚝뚝 흘리며 그 뒤를 따랐다. 축제의 메인 무대인 사크사이와만엔 커다란 제단이 설치돼 있었고 그 앞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은 먼저 도착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으로 시커멓게 덮인 언덕의 모습은 그 자체로 진풍경이었다.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피리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언덕 위의 모인 사람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피리소리에 화답하자 마침내 인티 라이미의 하이라이트인 태양신에게 행하는 제사가 거행된다. 이번엔 시작부터 경쾌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고 아까보다 더 많은 공연단이 합류해 무대 위를 껑충껑충 뛰어 다니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암, 축제는 이렇게 신나야지! 커다란 북을 메고 온 연주자들이 열정적으로 북을 두드렸고 댄서들이 쏟아져 나와 무대 위를 춤판으로 만들었다. 어느새 수 백명의 공연자들이 무대 위를 가득 메웠다. 단언컨대 내 평생 등장인물이 이렇게 많은 축제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전통공연도 레퍼토리가 상당히 훌륭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축제라니. 어느새 흥에 겨워 박수를 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각 부족 별로 끝없이 이어지는 신나는 춤사위에 빠져드는 사이 이 블록버스터 축제의 주인공인 잉카의 왕이 번쩍이는 황금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각 부족 댄서들의 춤사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축제는 차근차근 절정에 다다랐다. 무대 위의 사람들과 무대 밖의 사람들이 모두 흥분해 숨이 가쁠 때쯤 불현듯 음악과 춤이 중단됐다. 태양신과 만나기 전, 청결한 몸을 위해 일주일간 금식했다는 잉카의 왕이 제물로 바쳐진 라마의 심장을 움켜쥐고 태양을 향해 들어 올렸다. 축제 분위기로 들끓던 주변이 숙연해졌다. 비로소 그들의 마음속에 잉카의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무대 위를 화려하게 누비던 모든 잉카인들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휘저으며 태양신을 영접했고, 내 주변에 앉아있던 쿠스코 시민들 또한 열띤 환호를 보내며 그들의 조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중 한 명은 감격에 겨운지 환호를 보내다 목이 잠겼고, 쿠스코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유난히 열심히 흔들던 한 청년은 '비바 잉카!'(잉카 만세)라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단순히 흥미롭게 축제나 보러왔던 여행자의 마음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관광객들에게 터전을 내어주고잉카의 흔적을 점점 지워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페루인들의 마음엔 여전히 태양신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잠자던 그들의 가슴에 잉카의 혼이 깨어나 포효하는 모습을 직접 마주하니 뭉클해지기까지 했다. 잉카의 왕이 태양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제단에서 내려올 때까지 나는, 태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쿠스코 시민들 틈에서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글 | 태원준사진 | 태원준 artravel vo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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