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은 자Africa, AKAN 아프리카 여행을 꿈꾸게 된 계기는 사실 별것 없었다. 그냥 남들이 많이 가보지 않은 곳에 가보고 싶었다. 랭보가 절필 후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곳. 밥 말리가 그토록 목 놓아 노래 불렀던 땅.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났고, 피카소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가 있는 대륙. 역동과 순결의 아프리카.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여름의 아청 빛 저녁,밀 잎이 날 쿡쿡 찔러대는 오솔길 따라,잔풀을 내리밟으면꿈꾸던 나도발아래 그 신선함 느끼겠지바람은 내 얼굴을 스쳐 가리라. 아 말도 않고,생각도 않으리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영혼에서피어나리니,아, 나는 가리라,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연인을 데려가듯 행복에 겨워자연 속으로. - 랭보, 감각(Sensation) 독보적인 대륙영감의 땅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야? 거기 가면 뭐 볼 게 있어? 아프리카 가면 죽는 거 아니냐?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겠다는 내 얘기를 들은 주위 사람이 십중팔구 굉장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묻곤 했다. 비단 나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고자 하는 많은 여행자가 자주 듣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너무나도 막연해서 마치 시공간을 초월한 외딴 행성의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그들에게 "왜 아프리카로 가면 안 되는데?"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질병, 척박한 환경, 빈곤 등을 말했다.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 속 아프리카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구 반대편 불운의 땅으로 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구에게 지옥 같은 곳이 다른 누군가에게 천국 같은 곳일 수도, 또 어떤 이에게 불편한 환경이 다른 이에게 색다른 경험과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모습은 기껏해야 '동물의 왕국' 혹은 '내전과 기근', '쿠데타'와 관련된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대중들의 인식 속 아프리카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렇게 미디어에 의해 조작되거나 오도됐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전부 다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만약 아프리카가 정말 저주받은 땅이라면, 피카소가 아프리카 토테미즘 문화에 영향을 받고, 시인 랭보가 절필 선언 후 아프리카로 떠났으며, 밥 말리가 그토록 아프리카로 돌아가자고 목 놓아 노래 불렀을까? 문화, 예술 씬에 있어 아프리카 대륙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아프리카의 원형적 음악을 모태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흑인 노예들의 이동을 따라 파생된 레게, 재즈, 로큰롤, 힙합 등은 세계 대중음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자코메티 등 미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아프리카의 원초적인 에너지는 서구 미술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야수파 등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에게 아프리카는 거대한 자유이고, 굉장한 활력이 넘치는 신비로운 대륙이었다. 세상만사가 꼭 거창하게 정치,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과연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할 작은 여유조차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고, 그곳이 아프리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게, 그리고 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은 자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준비하면서 운명적으로 레게 음악을 접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록 음악 마니아였던 나는 레게 음악을 접한 뒤 음악적 성향뿐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에서도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레게 음악은 비주류인 록 음악보다도 더 비주류. 국내에서 레게 음악을 하는 밴드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명맥을 이어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랑과 평화'로 지칭되는 레게 정신과 여유로운 슬로우 리듬에 한 번 빠지게 된다면 쉽게 벗어나기 힘든 강력한 매력을 가진 음악이 바로 레게 음악이다. 레게의 중심에는 '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은 자'라는 별명을 가진 밥 말리가 있었다. 자메이카 출신인 '밥 말리'는 레게의 전설이자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7세에 첫 녹음을 시작하며 뮤지션으로 데뷔, 그 다음 해인 1963년에는 버니 리빙스턴, 피터 토시와 함께 '웨일러스'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그리고 그는, 밥 말리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흑인 해방 사상을 표방한 신흥 종교인 라스타파리안교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후 밥말리는 웨일러스 활동을 하던 중 1972년 영국의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한다. 그는 흑인 민중을 핍박하는 사회 현실을 비판한 곡들이 수록된 두 번째 앨범 내티 드레드(Natty Dread)를 발표하면서 흑인 민중의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시대의 아이콘이 된 그를 자메이카 정부가 그대로 놔둘 리 없었다. 1976년 자메이카 총선을 앞두고 인민국가당의 콘서트를 준비하던 중, 밥 말리는 아내와 매니저 그리고 자신의 팔을 크게 다치는 총기 테러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이어진 2년 동안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한다. 그 후 1978년, 내전 상태에 돌입하려는 자메이카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고, 평화콘서트에 참여해 앙숙이었던 두 정치지도자: 인민국가당의 마이클 만리와 자메이카노동당의 에드워드 시가의 화해를 주선한다. 밥 말리는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노래했고, 차별과 소외에 저항하며 반란을 꿈꿨다. 밥 말리의 레게 음악과 아름다운 멜로디, 그리고 눈부신 가사는 여전히 우리들의 지친 영혼을 위로한다. 밥 말리와 레게 음악은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닌 7-80년대 자메이카와 아프리카, 서구 사회를 휩쓴 거대한 문화현상이었고,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가 남긴 영혼의 노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오늘도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라스타 아프리카로 돌아가라 "어? 너도 라스타야? 나도 라스타인이야!"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며 곳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 라스타 컬러의 팔찌를 보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레게와 라스타의 뿌리를 찾아 여행하는 많은 사람을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빨간색(피와 형제), 초록색(에티오피아), 노란색(태양), 검정(피부색)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라스타 컬러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을 상징하는데, 이는 자메이카 흑인들이 자신들의 육체와 영혼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를 신앙적 차원으로 전개한 문화 운동이다. 레게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스타파리안이라는 문화, 종교적인 현상과 자메이카의 역사에 대해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 아프리카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17세기에 수많은 아프리카인을 배에 실어 서인도 제도로 이송시켰고, 그렇게 타의로 이동하게 된 아프리카인들은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밭에서 고된 노역을 하게 된다. 자메이카에서 노예제도는 1834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그러던 중 1930년, 하일레 셀라시에가 에티오피아 황제가 되고, 서유럽과 미국의 식민주의 지배를 반대해 온 세계 곳곳의 단체들은 이 황제의 즉위를 열렬히 환영하게 되었다. 서인도제도의 자메이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자메이카에서 그는 신으로까지 떠받들어졌다. 육체와 정신의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이 운동이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를 뜻하는 '자 라스타파리'를 신으로 추앙하는 형태까지 띤 것이다. 이들은 흑인의 힘과 통일을 노래했고 자메이카인들의 아프리카 복귀를 주장했다. 전 세계 수많은 히피와 예술가들이 라스타파니아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레게 음악은 '사랑과 평화'라는 슬로건 아래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사랑받았다. 나 역시 그 수많은 젊은이 중 하나였고,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내내 나의 음악 플레이 리스트에는 레게 음악들이 꽉 채워져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중 우연히 만난 피터도 라스타였다. 드레드 머리를 하고, 라스타 컬러의 팔찌, 레게를 상장하는 마리화나 잎 모양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그는 내가 레게와 밥 말리를 좋아한다는 걸 알자 서슴없이 나를 '형제'라 불렀다. 인종과 국적, 나이를 불문하고 레게 문화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누구나 스스럼없이 강한 연대감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피터는 주말 저녁 해변의 펍에서 레게 파티가 열린다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선뜻 그 초대에 응했다. 아프리카 여행 중 방문한 클럽이나 펍 어디서나 레게음악이 울려 퍼졌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레게는 음악 그 이상의 의미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케냐의 라무 섬 해변에서 열린 레게 파티에는 전 세계 젊은 친구들이 많이 모였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여행, 음악, 인생에 대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담조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당시에는 내 영어가 짧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레게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해 스스럼없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천국과 같은 해변에서 평화로운 레게 파티를 즐기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문득 밥 말리가 말하고자 했던, 그리고 레게 정신으로 대표되는 그 '사랑과 평화'의 의미가 국경을 초월해 다 함께 친구가 되고 소통하며 함께 나누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혹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게 굉장한 두려움과 위기감을 불러 일으킬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두려움 너머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세계가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아프리카와 레게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약 100일간의 아프리카 여행 이후 나는 레게 문화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본격적으로 여행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레게 음악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재생 목록 1순위이며 여전히 나는 아프리카를 꿈꾼다. 글 | AKAN사진 | AKAN artravel vol.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