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思索, 사색 四色리스본, 포르투갈, 태원준 붉은 전망대 근처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 지도부터 펼쳤다. 어느 도시에 도착하든 가장 먼저 하는 일. 생각보다 큰 도시인걸? 반나절짜리 작은 도시로 판단되면 일단 다리가 먼저 움직이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어디를 갈지 몰라 그제야 머리가 활발하게 움직인다. 리스본이 생각보다 커서 3분가량 지도와 씨름을 하는 중에 앙증맞은 망원경 그림이 눈에 잔뜩 들어왔다. 무슨 표시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망대라는데, 같은 표시가 시내 중심가에 다섯 개나 몰려있다. 뭔 도시에 전망대가 다섯 개씩이나? 중앙광장 쪽으로 움직이려던 생각을 접고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향했다.마침 기차역 바로 뒤편으로 '상 페드루 데 알칸타라(Miradouro de São Pedro de Alcántara)'라는 가장 긴 이름의 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름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풍경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근차근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 계단이 끝나자 나온 언덕의 경사가 너무 심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조금씩 굵어진다. 이거 첫 방문지로는 잘못 선택했구나. 후회가 밀려올 때쯤 아, 오른편으로 갑작스레 리스본의 모습이 빛을 뿜으며 쏟아진다! 반전치고는 과하다. 햇살을 머금은 수백, 수천 개의 건물이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다. 리스본의 모든 건물이 동일하게 붉은색 지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빨강의 농도가 너무 짙어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건너편 언덕 정상엔 리스본에서 가장오래된 건물 상 조르주 성(Castelo São Jorge)이 늠름하게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고, 오른편으로 바다만큼이나 광활한 테주강(Rio Tejo)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풍경도 나무랄 데 없지만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전혀 없어 가슴이 뻥 뚫린다. 전망대라는 역할을 이보다 잘하는 곳이 또 있을까? 여행하는 매일매일 '최고의 순간'을 뽑는다면 오늘은 지금이다. 리스본의 첫인상, 이쯤이면 훌륭하다. 이왕 이렇게 된 일 전망대 한 곳에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보고 싶은 것처럼 한눈에 반한 도시의 모습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어서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타 카탈레나(Miradouro de Santa Catarina)'전망대. 이번에는 단숨에 올랐다. 역시나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아찔한 풍경! 붉은 지붕들이 꼭 성난 파도처럼 하늘을삼키고, 그 파도 사이로 작고 노란 트램이 살짝살짝 나타났다 다시 숨는다. 와, 이건 하늘에 우표라도 한 장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엽서 같은 풍경이구나.여행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 유럽에서 한 나라의 수도가 된다는 건 엄청난 중책이 아닐까. 여행자들의 기대치가 전망대만큼이나 높이 올라가는 곳이 유럽이며, '생각보단 별로'라는 비난 역시 난무하는 곳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리스본은 적어도 그런 비난에선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에 올라 리스본을 풍경을 한눈에 담은 여행자라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골목의 냄새 이번에는 리스본의 구시가지라 할 수 있는 '알파마(Alfama)'지구로 향했다. 골목을 쏘다니는 걸 즐기는데, 지도상 미로 같은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게 이유다. 일단 알파마 지구 꼭대기에 있는 상 조르주 성(Castelo São Jorge)을 목표로 잡고 슬슬 다리에 시동을 건다. 그런데 시작부터 만만치가 않다. 근처에 있는 대성당이나 한번 보고 갈까 하는데 도통 못 찾겠다. 골목길이 사선으로 되어 있어 우회전 몇 번, 좌회전 몇 번 하고 나니 방향감각마저 완전상실. 길 찾는 거라면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헛웃음만 나온다.에라 모르겠다. 이왕 지도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거 내 맘대로 골목길 탐험에나 집중해야겠다. 길을 잃었지만 딱히 두려울 것도 없는 게, 알파마 지구는 워낙 고지대라서 여차하면 시내 중심가인 '바이샤(Baixa)'지구까지 무조건 내리막길만 내달리면 장땡이다. 신식 건물이 가득한 바이샤 지구와는 달리 이곳 알파마 지구는 1755년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은 지역이라 그 당시 중세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살짝 손만 대도 세월이 뚝뚝 묻어나올 것만 같은 오래된 건물이 가득하고 울퉁불퉁 솟은 돌담길에도 옛 정취가 가득 배어 있다. 낭만적인 분위기라기보단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곳인데 이 지역에 서민들의 주택이 몰려있기 때문이다.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골목. 이런 건 누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건물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빨래만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골목골목, 머리 위로 펄럭이는 빨래가 얼마나 많은지 정신이 쏙 빠질 정도. 이따금씩 빨래를 걷으러 나온 리스본의 어머님이 여행자를 향해 손에 든 셔츠만큼이나 밝은 미소를 보낸다. 아마도 내 얼굴엔 어머님의 미소보다 더 환한 미소가 새겨져 있을 것.알파마의 골목은 미로 같기도 하거니와 일부 골목은 매우 좁기도 하다. 차 한 대가 내려오면 길을 내어주기 위해 건물 입구에 바싹 붙어야 한다. 그때, 문득 한 상점에서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음악 '파두(Fado)'가 흘러나왔다. 구슬픈 가락에 마치 시를 읊는 듯, 상당히 서정적인 음악인데 바로 이곳 알파마 지구가 그 발상지로 알려져 있어 언제쯤 들리려나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선술집이라면 맥주라도 한잔 마시며 감상하다 가겠는데 상점을 들여다보니 옷가게다. 주인아주머니께 멋쩍게 웃어 보이곤 옷가게 앞에서 잠시 동안 공짜로 파두를 감상했다.언덕으로 올라갈수록 고풍스럽고 찬연한 골목길이 계속 이어진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깜찍한 상점들과 한쪽 벽 가득 그려진 유쾌한 그래피티를 구경하는 것 모두 여행자를 들뜨게 했다. 유럽에서 골목이 안 예쁜 도시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리스본의 알파마 지구는 그 중 상위권 주자들과 경쟁을 벌여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늦은 오후에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어느새 알파마 지구에 어둠이 찾아왔다. 약한 빗줄기가 어두운 골목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제야 나는 내리막길을 찾아 잰걸음을 놓는다. 오래된 속도의 소리 리스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트램'. 우리나라에나 없지, 사실 트램이야 세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흔한 대중교통이기에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리스본의 트램은 조금 다르다. '훨씬' 작고 귀엽다. 사실이다. 신호를 기다리며 잠시 멈춰있는 트램을 보면 달려가 안아주고 싶을 정도다.줄줄이 이어진 다른 도시의 트램과는 달리 리스본의 트램은 대부분 1량짜리다. 길이도 무척 짧아 눈대중으로 보았을 때 키 큰 남자 서너 명이 누우면 길이가 똑같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빨강, 노랑 트램은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리스본 곳곳을 누빈다. 리스본이 커다란 꽃이라고 한다면 트램은 그 사이를 쉼 없이 오가는 빨강, 노랑나비라고 할 수 있겠다.몸집은 작지만 안 가는 곳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내를 줄기차게 달리는 것은 물론 알파마 지구의 좁은 골목길도 오가고 심지어 경사가 45도는 되어 보이는 가파른 전망대 언덕도 거뜬하게 오른다. 전망대로 향하는 녀석들은 관광객들에 의해 푸니쿨라 혹은 케이블카라고 불리지만 생김새는 트램과 다를 바가 없다. 가장 인기 있는 노선은 예쁜 골목이 가득한 알파마 지구를 누비는 28번 노선과 포르투갈의 옛 영화를 느낄 수 있는 '벨렝(Belem)'지구로 향하는 15번 노선. 이왕이면 인기 코스를 타고 시내를 누벼보고자 사람이 북적이는 28번 트램에 올랐다. 리스본에서 트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기에 기점에서 타지 않는 이상 자리에 앉아서 가기란 쉽지가 않다. 트램이 워낙 짧고 좁아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살을 부대낀다. 그 사이를 비집고 겨우 자리를 잡고 나니 좁은 틈에서 신문을 펼쳐보는 노신사도 보이고, 장바구니를 들고 어딘가로 향하는 할머니도 보인다. 소매치기는 없나 주위를 살피며 가방을 꼭 끌어안은 여행자도 보인다. 버스나 지하철처럼 빠른 교통수단에 익숙하다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할 정도로 느리지만 덕분에 창밖 풍경을 찬찬히 구경할 수 있다.창밖으로 보이는 리스본은 한 나라의 수도라 하기엔 참 소박한 모습이다. 높거나 화려한 건물 대신 푸근함이 느껴지는 옛 건물이 줄지어 나타난다. 보면 볼수록, 오래된 필름 사진 같은 정겨움이 묻어나는 도시다. 아니, 도시라기보단 동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언덕으로 들어선 트램이 서서히 속도를 내자 삐거덕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트램 안을 가득 채운다.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어 나는 이 소음마저 묘하게 정겹다. 대항해 시대의 기억 포르투갈이 지금은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났지만 한 땐 남미의 거대국가 브라질까지 집어삼키며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벨렝지구는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탐험가들이 세계를 향해 닻을 올리던 곳이다.벨렝 지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높이가 50m가 넘는 범선 모양의 거대한 조각. '발견기념비(Monumento das Descobertas)'라 불리는 이 화려한 조각엔 해양왕 '엔리케 왕자'와 인도 항로의 개척자 '바스코 다 가마', 인류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마젤란' 등이 늠름한 표정으로 테주 강을 바라보고 있다. 개척자 하면 빠지지 않는 세 사람이 모두 포르투갈 출신이라니. 발견기념비 앞으로는 붉은색 세계지도가 바닥을 뒤덮고 있다. 저마다 자신의 나라에 주저앉아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자들 사이로 우리나라 지도를 바라본다. 갑자기 우리나라와 북한이 단순히 '위치만' 바꿨으면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든다. 기차를 타고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곳 유럽 끝까지 육로로 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벨렝지구에서 포르투갈의 옛 영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발견기념비뿐만이 아니다. 그 건너편에 위치한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은 바스코 다 가마와 선원들이 인도로 떠나기 머물렀던 지역에 건축된 거대한 수도원이다. 아니, 발견기념비에 이미 거대하다는 표현을 썼으니 이 수도원엔 막대하다는 표현을 붙여야겠다. 보는 순간 열에 아홉은 그대로 압도되고 말 법한 엄청난 크기의 하얀 수도원이다.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는 화려함을 넘어 현란하고, 여기저기 뒤엉킨 굵은 기둥은 단단함을 넘어 육중하다. 이거 리스본 시내가 참 소박하고 여유롭다 생각했는데 벨렝 지구는 완전히 반대다. 건설하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린 이 수도원의 건설비용은 16세기 당시 동양에서 수입한 특정한 향료에 매긴 세금으로 충당했다고 하니 대항해 시절 포르투갈의 무역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화려했던 과거를 이젠 역사로만 기억할 수밖에 없는 포르투갈의 현실에 다소 씁쓸해지기도 한다. 하긴 '왕년에' 잘 나가지 않았던 이가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테주 강이 대서양에 흘러드는 지점에 있는 '벨렝탑(Torre de Belem)'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강 한가운데 지어졌는데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강가로 밀려났다는 재미있는 역사를 가진 3층 탑. 워낙 큰 규모의 두 건축물을 보고 와서 그런지 감흥은 살짝 떨어지지만, 이 탑의 별명을 듣자 웃음이 터져 나온다. 별명은 바로 '테주강의 귀부인'. 그 사실을 알고 탑을 바라보니 마치 순백의 긴 드레스를 늘어뜨린 우아한 모습의 여인 형상이다. 누가 별명을 지었는지 기가 막혀 내 별명도 한번 맡겨보고 싶다. 그 우아한 귀부인 앞에 앉아 이번 여정을 곱씹는다. 전망대와 골목을 쏘다니던 시간도 대항해 시대에 환호하던 오늘도 참 좋다. 입가에 은은하게 웃음이 번져나가는 걸 보니 리스본이 결국 나의 마음을 빼앗았구나 싶다. 파도 너머로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테주강의 귀부인은 붉은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는다. 꽤 오랫동안 기억될 명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글 | 태원준사진 | 태원준 artravel vol.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