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졌습니다부탄 | 최갑수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는 그의 책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 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제프씨의 말이 맞다. 인생은 원래 물거품이다. 모든 것은 덧없고 사라진다. 허무한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당신은 내게서 멀어져가고 있고 나는 당신을 점점 잊어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조금 더, 행복하도록 하자. 질문의 시작 갈라파고스에서 죽음 직전의 순간을 경험한 이후, 남아공 더반에서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그리움을 경험한 이후, 나는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걸까? 그 물음을 안고 부탄으로 향했던 어느 날. 비행기 창문 너머로 흰 눈을 머리에 인 히말라야의 설산이 보였다. 태국 방콕 공항에서부터 녹초가 된 몸은 아침 해를 받아 명징하게 빛나는 설산을 바라보며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생수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당신의 이름을 살짝 불러보았다. 당신은 오래 전부터 내가 만나고 싶었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창에 입김을 불며 당신의 이름을 썼다가 지웠다. 당신 이름이 지워진 자리, 창문 너머 어떤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듯 유리창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당신을 향한 마음이 들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파로(Paro) 국제공항에 내려 심호흡을 크게 했다. 히말라야에 고여있던 맑은 공기가 가슴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부탄 전통옷을 입은 남자들이 보였다. 공항에 근무하는 공무원인 것 같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근 눈동자, 오똑한 콧날을 가지고 있었다. 깨끗한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먼저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여행자들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매너다. 공항에서 수도 팀푸(Thimphu)로 가는 길, 비포장 도로는 아찔한 협곡 사이를 지난다. 실수하면 아득한 벼랑 아래로 차는 굴러 떨어질 것이다. 가이드는 부탄의 길이 대부분 이렇다고 설명한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버스는 산등성이를 힘겹게 오른다. 부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와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초지는 국토의 10%가 채 되지 않는다. 국토의 대부분은 비탈과 협곡이다. 부탄 사람들의 삶은 가파른 비탈에 기대고 있다. 이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행복지수 세계 1위. 국민의 97%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나라. 방콕에서 부탄행 둑 에어(Druk Air) 오르며 품었던 이 의문은 부탄을 여행하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부탄은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4분의 1, 인구라고 해봐야 75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히말라야 동쪽에 숨은 듯 자리한 이 나라는 자유여행을 허가하지 않고 하루에 200-250달러 환경세 개념의 여행경비를 내야 하는 패키지 투어만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베테랑 여행자들 가운데서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 부탄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입국한 외국인 수는 약 20만 명, 이 가운데 한국인 여행객은 1,000여 명 정도라고 한다. 부탄의 첫 감흥은 동남아의 여느 중소도시에서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행의 첫 목적지는 수도 팀푸. 수도라고 해봐야 인구 10만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는 긴 협곡을 따라 들어서 있다.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고, 부탄 전통복장인 '고'와 '키라'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붉은 옷을 입은 승려들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느라 바쁘다. 길가 조그만 구멍가게에서는 코카콜라를 잔뜩 쌓아놓고 판다. 겉모습만 봐서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들은 왜 행복할까. 여러 지표상으로 부탄은 가난한 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이 2,800달러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 이틀만 부탄을 겪어보면 이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 상태마저도 엉망이지만 서두르는 법 없는 부탄 사람들은 도로 사정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쁜 도로 사정을 탓하는 건 오직 관광객들뿐이다. 히말라야에서 쏟아져 내린 풍부한 수력으로 전기를 만들어 인도에 팔고 그 돈으로 모든 공산품을 수입해서 쓴다. 그러니 미세먼지나 공해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관광산업에서 얻는 수익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는 재원이 된다. 여행하는 외국인들도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1999년 부탄의 국가 행복지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행복을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탄 행복연구소' 도지펜졸 소장은 "부탄은 국민의 행복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고 국가를 운영한다"고 말했다. 어떤 정책도 '국민 행복'과 부합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정책은 10-15명으로 구성된 '국민총행복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총점 78점을 얻지 못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 헌법에 숲 면적을 국토 면적의 60% 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나라가 부탄이다. 4대 국왕 직메싱계왕축(1955-)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의회민주주의로 이양을 선택했다. 그 결과 2008년 총선이 실시돼 지금은 총리가 수반이 돼 부탄을 통치하고 있다. 하루 7시간 노동도 철저히 지켜진다. 자, 우리나라와 부탄 중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부탄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사흘을 보내는 동안, 이들의 미소 때문이었을까 마음 한 켠에는 어떤 잔잔한 일렁임 같은 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거리에 울려 퍼지는 새벽 타종 소리와 함께 눈을 떴을 때, 숙소 밖으로 몰려든 자욱한 우윳빛 안개를 보며 내 속에 무언가가 조금씩 채워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도하곤 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잃어버렸던 어떤 음악을 비로소 찾아 듣게 됐을 때와 비슷한 감정 같기도 했고 손에 따뜻한 조약돌 하나를 꼭 쥐고 서 있는 듯한 기분 같기도 했다. 서서히 마음이 돋아나던 시간들. 우리 몸을 순환하는 피의 온도를 느낄 수 있던 시간들. 그 아침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만약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아니다'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함정과 덫을 피해 겨우 여기에 다다랐는가. 이제서야 당신 앞에 섰다. 나는 알고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뺨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되기까지 내가 잃었던 많은 사랑들. 그 어리석은 일들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산등성에서 밀려오는 아침 안개를 바라보며 나는 따뜻한 밀크티를 마셨고,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의 얼굴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나는 겨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부탄은 불교국가다. 부처가 세운 나라다. 국민의 거의 100%가 불교 신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부탄의 불교는 8세기경 인도 북부에서 태어난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가 전했다. 거리 곳곳에는 불경을 적은 깃발인 룽다가 펄럭이고 사람들은 곳곳에 설치된 마니차를 돌리며 걷는다. 팀푸 중앙에 3대 국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탑인 메모리얼 초르텐(Memorial Chorten)이 있는데, 팀푸 사람들은 출근할 때 이 탑을 세 바퀴 돌고 퇴근할 때 다시 세 바퀴 돈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이토록 간절한 걸음과 아득한 눈빛은 본 적은 없고 그토록 행복한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부탄 서부 지역 왕디(Wangdue)에 자리한 네젤강 사원은 부탄 불교의 시원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부탄의 불교는 티베트 불교에 인도의 불교가 더해진 것으로 주문과 주술을 중요하게 여기는 밀교다. 파드마삼바바는 경전을 부탄 곳곳에 숨겨놓았는데 네젤강 사원은 그 가운데 하나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왕디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한 사원은 고요하면서도 장엄하게 서 있다.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사원은 아마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그다지 모습이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스님들이 읊조리는 경전 역시 당시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사상가 다치바나다카시는 그의 책 「사색기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역시 이 세상에는 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직접 그 공간에 몸을 두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그런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육체를 그 공간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부탄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백과사전과 인터넷에서 파드마삼바바와티벨 밀교의 계보를 파악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직접 부탄의 사원을 찾아가 '옴마니반메옴'을 발음해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부탄 불교의 경건함과 비밀스러움은 절대 문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경험과 학습을 위해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부탄 불교의 하이라이트는 탁상사원이다. 부탄을 찾는 모든 여행자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불교를 전파하러 부탄에 온 파드마삼바바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명상에 잠겼다. 해발 3,120m 지점,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탁상상원은 부탄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2시간쯤 트래킹을 해야 닿는다. 만만한 길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무거운 걸음을 떼며 이곳에 오른다. 어쩌면 당신은 탁상사원에 오르는 동안 마음을 찾을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나무 그늘에서 쉴 때, 까마득한 산 속에 만들어진 라타(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만장)를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결핍이 간절함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에 대한 결핍이 간절함을 낳고, 그 간절함이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행복 앞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건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당신에 대한 결핍이 당신을 가능하게 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처럼. 탁상사원에서 내려와 머문 파로의 숙소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지구 반대편에 있을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을 생각하며 부탄의 진한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달지는 않았지만 쓰지도 않았다. 그냥 맥주맛이었을 뿐이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모든 것이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불행하지도 않았으리라. 어쨌든 당신을 만난 후 마음이라는 게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사원의 종소리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제 승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글러브를 벗고 조용히 마운드를 내려와 끝없어 어두워져가는 산맥을 바라보며 맥주나 마시고 싶다. 당신을 끌어안고 포도를 까먹으며 인생을 낭비하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이제 그곳은 아침이겠군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여기는 어둡습니다. 당신은 어느 시간에 계신지요. 당신을 생각하며 비 내리는 산장에서 찬 손을 비비고 있습니다. 이 비가 그치면 봄이 더 깊어지겠지요. 어서 돌아가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곳의 봄을 함께 걷고 싶으니까요. 당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던 그 밤의 기쁨과 설레임이 아직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답니다. 사원으로 가는 길, 산허리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길 끝에는 당신이 서 있더군요. 당신 생각이 멀리까지 밀려갔다 밀려왔던 오늘이었습니다. 당신 생각의 끝에서 끝까지 바람이 불었던 오늘이었습니다." 펜을 내려놓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한 사랑을 그리워하며 먼 산맥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다. 그의 앞에는 맥주잔이 놓여있고 사내의 눈은 그리움과 설레임으로 젖어있다. 어떤가 그다지 나쁜 인생은 아니지 않는가. 이만하면 행복하지 않은가. 나는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후기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봅니다. 전봇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고 단골 카페의 입간판도 제자리에 서 있습니다. 600번 버스는 여전히 잘 다니고 있고요. 저물 무렵이면 같은 농도의 노을이 거리를 보랏빛으로 물들입니다. 자전거를 세우고는 팔짱을 끼고 이 풍경을 바라보며 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군,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는 집 앞 슈퍼마켓에서 맥주 두 캔을 사서는 핸들에 매달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죠. 삐걱삐걱. 페달을 밟다보면 '존재에 특별한 이유 따위는 없어. 그냥 고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지 뭐'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하루가 가고 우린 그 시간 속에 조용히 서 있다 어느 날 사라지는 거죠. 그런거죠. 네 그런 겁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네요. 그동안 우리는 조금 더 낙관적이 되었고 조금 더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움을 만들었지만, 그리움을 그리움대로 남겨두는 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그리움이 커져 하나의 큰 파도가 되고 그 파도가 내 앞으로 스스로 밀려들어 우리의 발목을 따뜻하게 적실 것이라는 걸 알게 됐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졌습니다. 글│최갑수사진│최갑수 artravel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