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점점 더 여행이 간절하고 나는 갈수록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남아공│최갑수 # 인생에는 일어날 만한 일만 일어난다 여기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다. 원래 홍콩과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더반으로 가는 여정이었지만 비행기 연결 사정으로 갑자기 이곳에 오게 됐다. 여행이란 늘 이런 식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우리를 내려다놓고는 나몰라라 해버린다. 그래도 에티오피아는 예전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홍콩에서 아디스아바바까지 11시간의 비행. 담요를 부탁했지만 승무원은 담요가 없다며 대신 따뜻한 차를 마셔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나는 홍차를 마시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스리랑카 콜롬보 상공을 지날 때쯤이었다. 창 밖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창문은 복숭아빛으로 물들었고 인도양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이 주는 행운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더 좋은 건 비행기가 일찍 도착해 시간이 조금 남았다는 것. 그래서 비록 공항에서지만 에티오피아 커피를 에티오피아에서 마실 수 있었다는 것. 커피는 기대보다 별로였지만 여기는 아디스아바바공항이니까 이 정도 쯤이야 뭐. 커피를 마시며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쉼 없이 출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고 또 어딘가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공항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인생에는 그다지 좋은 일도 없고 그렇게 나쁜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인생에는 각자에게 일어날 만한 일만 일어난다. 그러니까 조금만 애를 쓰면 그럭저럭 극복하며, 즐겨가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또 인생인 것이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이것이 아닐까 하며 나는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여기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다. # 약간의 무시와 어쩔 수 없는 긍정이 없다면 우리는 수많은 여행을 어떻게 마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만 하루가 넘게 걸려 도착한 더반. 365일 중 흐린 날이 거의 없다는 도시에는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비행의 피로에 나쁜 날씨까지 겹치면서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더반에 도착하자 마자 시티투어를 했다. 정확히 1시간 10분 동안 도요타 랜드크루즈를 타고 시내를 돌아보았다. 작은 공예품 시장 하나를 본 후 월드컵 경기장 앞에 섰다. 가이드 프리티는 더 이상 보여줄 게 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간이 남아 커피를 마셨다. 에스프레소 한 잔이 고작 1,600원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점심식사를 하러 간 레스토랑에서는 와인 한 병이 8,000원이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호텔바에서 마신 맥주도 2,900원이었다. 우리는 와인잔을 비우며 비행기 연착으로 엉망이 된 여정과 더반의 폭우를 모두 용서할 수 있다며 웃었다. 비가 잠시 그쳐 오후에는 골든 마일 해변을 걸었다. 더반의 골든 마일은 무려 12킬로미터나 이어지는 해변이다. 세계 3대 서핑 비치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서퍼들은 궂은 날씨 속에서도 열심히 파도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모래밭에 'I love durban'이라 글씨를 쓰고는 사진을 찍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약간의 무시와 어쩔 수 없는 긍정이 없다면 우리는 수많은 여행을 어떻게 마칠 수 있었을까. "해가 뜨면 모든 게 달라질 거에요. 내일은 날씨가 좋을테니까, 걱정말고 굿나잇." 프리티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밴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폭우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오후 일정은 모두 취소. 호텔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꼼짝없이 비치보이스를 들어야만 했다. # 이 아름다운 도시를 모른채 살았다면 정말이지 억울했을 것 같아 다음날 마법이 일어났다. 프리티의 말처럼 해가 뜨자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바다는 황금빛으로 찬란했고 야자수는 기분좋게 잎사귀를 흔들어댔다. 해변은 조깅하는 사람들과 스케이트 보드를 탄 청년들로 넘쳐났다. 바다에는 서퍼들이 바글댔다. 바다는 그들에게 3미터가 넘는 멋진 파도를 선사해주었다. 서핑보드 위에 걸터앉아 서퍼들은 수도승처럼 경건하고 엄숙하게 파도를 기다렸다. 더반에서 며칠만 머물다 보면 이 도시를 진정으로 즐기고 사랑하는 이들이 서퍼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뜨기 전 바다로 나간 그들은 바다 위에서 아침 안부인사를 나눈다. 해가 뜨면 바다에서 나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은 후 출근하고 퇴근하기가 무섭게 다시 서핑보드를 챙겨 바다로 달려간다. 집과 일터와 바다를 오가는 심플한 삶.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이란 적게 할 수록 좋은 것이며 인생을 즐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쨌든 해가 뜨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챙겨 먹고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는 3,000원을 내고서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신나게 달리는 것이 더반의 멋진 날씨 속에 불시착한 어리둥절한 여행자가 해변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초보적인 방법인 것이다. 로열 마일 남쪽 끝에는 모요(moyo)라는 카페가 있는데 수상 방갈로처럼 이곳에서 바라보는 더반은 하나의 완벽한 세계다. 짙푸른 인도양과 황금빛 해변, 세련된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가 다정하게 어울려 있다. 해변에는 백발의 노부부들이 손을 잡고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고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바다를 가르치는 아빠도 있다. 점심은 해변에 위치한 서퍼 라이더라는 레스토랑에서 햄버거와 피자를 먹었다. 이곳에서 직접 만든 맥주는 향기롭고 맛있었다. 웨이터는 맥주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자, 인도양의 파도를 마셔보는 거야" 하며 눈을 찡긋했다. 맥주와 함께 햄버거를 먹으며 우리는 행복했다. "이처럼 완벽한 날씨와 풍경 속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누군가가 말했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제가 나빴다고 오늘까지 나쁘란 법은 없어.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더 좋을 거야" 이렇게 말하며 우리는 맥주잔을 힘껏 부딪혔다. 오후에는 해변 끝에 위치한 '우샤카 마린월드'를 돌아보았다.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해양 테마공원으로 열대어부터 돌고래와 바다표범은 물론 수십 종류의 상어까지 다양한 해양생물을 만나볼 수 있다. 커다란 바다거북과 만타가오리, 물개쇼를 보며 우리는 어린 토끼마냥 즐거워했다. 수족관을 나오는 길, 누군가 말했다. "더반에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아름다운 도시를 모른채 살았다면 정말이지 억울했을 것 같아." # 사랑은 곳곳에 넘쳐난다 오후 5시 반 해질 무렵. 더반 로열 마일. 인도양의 거센 파도가 넘실대는 곳. 사무복을 입은 젊은 여성 두 명이 서류가방을 들고 모래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소리를 지르며 바다를 향해 뛰어든다. 사랑은 곳곳에 넘쳐난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 높은 곳은 당신을 생각하기에 좋다 다시 케이프타운이다. CNN과 BBC, 뉴욕타임즈 등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 등 온갖 찬사를 바친 도시, 여행잡지 「론리플래닛」이 '2017년 도시별 최고의 여행지 베스트 10'에서 2위로 선정한 도시.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자마자 테이블마운틴에 올랐다. 운이 좋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케이블카 운행이 바로 중단된다. 이곳을 찾은 60%의 여행자들이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발걸음을 돌린다고 한다. 설사 정상에 오르더라도 갑자기 두터운 안개가 밀려와 안개만 보고 내려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가이드 마틴은 "숙제부터 얼른 해치우자"며 우리를 테이블 마운틴으로 이끌었다. 해발 1086m. 축구장의 15배 크기. 길이가 동서로 3.2km에 달한다. 8억5000만년 전 바닷물에 잠겨 있던 모래땅이었는데, 대륙판이 이동하면서 치솟아올랐다고 한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 침식과정을 거치면서 정상부가 평지를 이루게 됐다. 산 위에는 'A gift to the Earth(지구에 준 선물)'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판이 있다. '높은 곳은 당신을 생각하기에 좋다.' 발 아래 아득하게 펼쳐지는 대서양을 바라보며 이 문장을 떠올렸고 당신과 함께 왔다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지구 반대편의 먼 먼 땅까지 와서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아니 당신을 그리워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날아온 것인지. 8억 5,000만년 전 어떤 그리움이 있어 이 무거운 땅을 바닷속에서 끌어올렸는지. 어쨌든 오늘은 운이 좋아 테이블마운틴에 올랐고, 당신을 떠올릴 수 있었고, 당신과 함께 오고 싶은 곳이 한 곳 더 늘어났다는 사실. # 남위 34도21분25초. 내가 당신을 그리워했던 가장 남쪽 지점 케이프타운을 벗어나 희망봉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달린다. 바닷가의 굴곡을 따라 심전계 눈금처럼 요동치는 '채프먼스 피크'는 400여 번의 굴곡으로 유명한 도로다. 오른 쪽 차창으로는 영화에서 본듯한 화려한 부촌이 잇따라 펼쳐진다. 지중해풍의 호화별장들이 언덕을 따라 늘어서 있다.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브루스 윌리스 등 할리우드 스타들도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고 한다. 아프리카의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은 15세기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1488년 처음 이곳에 도착한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험한 날씨와 폭풍 때문에 '폭풍의 곶'이라 이름 붙였다. 1497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이곳을 통과하면서 '희망의 곶', 희망봉으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희망봉이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고 믿은 유럽 선원들이 항해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이 봉우리를 보고 고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리학상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극점은 아굴라스곶이다. 일부러 그곳까지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희망곶에서도 무려 2시간이나 떨어져 있고, 주변에 딱히 달리 볼 것이 없어서다. 케이프 등대에서 희망봉까지 걸었다. 약 1시간 반 정도. 해가 뉘엿해질 무렵, 바다는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걷다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바다가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얘야, 여행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없다는 걸 가르쳐주지.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얻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도 가르쳐준단다. 그러니 계속 걸어 가렴." 희망봉에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어느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작별을 뒤에 둔 듯, 해질 무렵 보라의 공기 속을 조용히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그렇구나. 세상에는 분명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덜 사랑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리움은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구나. 남위 34도21분25초. 내가 당신을 그리워했던 가장 남쪽 지점. # 모든 일이 먼 옛날의 지나간 파도처럼 여겨질테니 케이프타운의 밤이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깬다. 깨어나서 서성이며 당신을 그리워한다. 언젠가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잠든 당신의 등뼈에 귀를 갖다 댄 적이 있다. 파도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에게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우리는 사랑이라는 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의 등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던 그 밤. 가서 뼈처럼 눕고 싶었던 그 밤. 거긴 따뜻할 것이고, 당신의 숨소리로 고요할 것이고 한숨 자고 나오면 모든 일이 먼 옛날의 지나간 파도처럼 여겨질테니. # 여행은 짧은데 삶은 왜 이리 혹독하고 긴 것인가 여행의 마지막날이다. 스텔렌보시 지역에 자리한 와이너리 '조단'(Jordan)에서 오래오래 와인을 즐겼다.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는 멋진 테이스팅룸, 맛있는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 아름다운 자연경관까지 갖춘 완벽한 와이너리다. 조단의 야외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다보니 가이드가 "케이프타운에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이제 집으로 가고 있다. 비행기 좌석 모니터에는 길이 2센티미터의 비행기가 부지런히 날아가고 있다. 몇 시간 후에는 내가 출발했던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떠나가는 비행기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은 짧은데 삶은 왜 이리 혹독하고 긴 것인가. 발이 부었고 허리가 아프다. 다음 여행은 이번 여행보다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 당신에게 인사를 하고 나올 수 있게 새벽에 출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따뜻한 손을 떠올릴 수 있도록 겨울이었으면 더 좋겠다. 글│최갑수사진│최갑수 artravel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