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소주에 빠진 날

돼지가 소주에 빠진 날 -with 박찬일, 레이먼김가고시마│일본│최갑수 단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질 때가 있다. 봄의 장미나 저물녘 노을 속에서 있는 미루나무 한 그루, 또는 유카타를 입은 여인의 목선 같은. 그리고 단지 맛있는 것을 먹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질 때가 있다. 잘 뽑아낸 우동가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때나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자를 때, 혹은 버터향 가득한 크루아상을 한 입 가득 베어 물 때 불현듯 밀려오는 행복감. 우리 인생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 인생은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그 허무의 날들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사랑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 살아가는 일은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본질은 낭비인데, 그 낭비의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고, 여행은 곧 먹고 마시는 일일 것이다. 어느 봄날. 박찬일, 레이먼 킴 두 요리사와 함께 일본 가고시마에 갔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먹고 마시기 위해서다. 이것만큼 명확하고 분명한 여행의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일로 바빴다. 매일 매일 뜨거운 불 앞에서 요리를 해야 했고, 업장을 관리해야 했고, 글을 써야했고, 방송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했다. 먹고 마시는 일을 해야했지만 먹고 마시는 일이 즐겁지만은 않았다는 뜻. 그러던 밤, 우리는 을지로의 어느 골뱅이집에서 김 빠진 맥주를 앞에 두고 앉았다. "아, 먹고 마시고 놀고 싶다." 누군가가 한탄섞인 이 말을 내뱉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두는 진심으로 '먹고 마시고 놀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여행지를 검색했고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했다. 가고시마에서 우리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먹고 마셨다. 라멘, 야키도리, 돈가스를 먹었고 소주, 생맥주, 사케, 위스키를 마셨다. 충분히 즐거웠다. 이 글은 우리가 먹고 마셨던 며칠에 관한 기록인데, 아마도 이 글 내내 '먹다' '마셨다'로 끝나는 문장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이어질 것이다. 아참, 이번 여행의 '제목'은 '돼지가 소주에 빠진 날'. 가고시마는 일본에서 흑돼지와 소주가 가장 유명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여행지로 가고시마를 선택한 이유도 흑돼지와 소주. 단 두 가지 음식 때문이다. 휴게소 라멘부터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을 때 우리는 충분히 허기져 있었다. 렌터카를 빌린 후 가고시마로 가는 자동차 도로에 올라서서는 무조건 첫 휴게소에 들어가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다행히 30분 쯤 지나자 휴게소가 나타났고 우리는 자석에 이끌리듯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레이먼이 물었다. "형, 우리 뭐 먹을까요?" 박찬일이 대답했다. "라멘 먹어야지. 걸쭉한 돈코츠 라멘 국물이 좋지 않을까?" 규슈는 돈코츠 라멘으로 유명하다. 돼지뼈를 푹 고아 우려낸 걸쭉하면서도 묵직한 육수에 탱탱한 면을 푸짐하게 담아낸다. 한국이라면 아침으로 좀 부담스럽겠지만, 우리는 여행을 떠나왔고 여기는 일본이다. 아침부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돈코츠 라멘을 먹는여행자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의 라멘은 각 도시마다 약간씩 특색이 있는데, 가고시마 라멘은 후쿠오카나 구마모토 등의 여타 규슈지역의 라멘에 비해 약간 담백하다. "음. 예전에 먹었던 잇푸도나 구루메 다이호의 라멘에 비해서는 약간 라이트한 거 같은데…" 박찬일의 평이다.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조미료 맛이 혀에 확 와닿는 건 일본 휴게소도 어쩔 수 없네요." 레이먼의 평. 그렇지, 여긴 휴게소니까. 지방 돈가스와 반드시 나마비루 시간을 달려 마침내 가고시마에 도착했고 우린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점심 시간이었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배가 고팠다. 휴게소에서 라멘 한 그릇으로 때운 부실한 아침식사를 반드시 근사한 점심식사로 만회해야 했기에 구글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최대한 가까운 곳에 가장 맛있는 식당을 뒤졌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가고시마중앙역 근처의 '쿠로카츠테이' 가고시마 최고의 별미는 흑돼지(쿠로부타)다. 흑돼지는 가고시마가 일본 최대 산지다. 돈가스는 기본이고 샤브샤브로도 먹는다. 쿠로카츠테이는 가고시마에서 손꼽히는 돈가스 맛집이다. 1975년 문을 열었다. 가고시마의 계약농장에서 기른 흑돼지를 사용한다. 가고시마 중앙역에 있는 본점과 텐몬칸점 단 두 곳의 점포만 운영한다. 점심시간이면 인근 직장인들이 돈가스 정식을 먹기 위해 긴 줄을 서는 곳으로 현지인들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우리는 '상 로스카츠 런치'를 주문했다. 가게 입구 입간판과 메뉴판에서 '대표 메뉴'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식당에서 시키는 대로 먹는 게 제일 낫다. "뭘 먹을지 모를 땐 무조건 '오늘의 메뉴'를 시킬 것. 실패할 확률이 제일 적지." 일본 여행경험이 많은 박찬일의 귀띔이다. 역시 실패하지 않았다. 최상급 등심만을 사용한 로스카츠는 '비쥬얼'부터 달랐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두툼한 돈가스가 접시 위에 '늠름하게' 올라 있었다. 잘린 단면을 보니 지방이 반이었다. "이야, 이거 지방을 일부러 제거한 게 아니네. 지방에 자신이 있다는 거지."(박찬일) "한국에서 이렇게 내면 큰일날 걸요. 돈가스에 비계가 있으면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그럴 거에요."(레이먼 킴) 우리는 500cc '나마비루'(생맥주)도 한 잔씩 주문했다(왠지 나마비루는 나마비루라고 해야 그 맛이 온전히 전해진다. 생맥주라고 하면 김빠진 것처럼 허전하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생맥주라고 해야 그 맛이 전해진다. 치킨엔 생맥주). 이런 멋진 돈가스가 있는데 나마비루를 마시지 않는다면, 이건 돈가스에 대한 실례다. 맛있는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건 술이다. 일단 먹어보자. 느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살 사이에서 빠져나온 육즙이 입 속을 가득 채웠다. 이 사이로 감기는 비계의 고소한 맛이 환상이다. 탄력 가득한 식감도 압권이다. 바삭한 튀김옷이 스펀지같은 돼지고기와 잘 어울린다. 안심과 등심을 골고루 사용한 '쿠로카츠테이 런치'와 돼지 허벅지살로 만든 '모모카츠 런치'도 맛있다. 이 집은 다른 돈카츠집과는 달리 서양식 소스인 '요후 소스(洋風ソ-ス)'와 일본식 소스인 '와후 소스(和風ソ-ス)'를 함께 내놓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우리는 후다닥 돈가스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빈 나마비루 잔을 탁, 하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입가엔 돈가스 기름이 살짝 묻어있었고 우리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잘 먹었다.' 마음을 읽는가이세키 돈가스에 생맥주를 '흡입'한 우리는 숙박지인 이부스키로 향했다. 이부스키는 천연 모래찜질 온천으로 유명한 곳. 해안에 검은 모래사장이 펼쳐지는데 이곳에 모래찜질방이 마련되어 있다. 적당한 곳에 누우면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모래를 삽으로 덮어준다. 10-15분 정도 누워 있으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해안 쪽으로 갈수록 모래 온도가 더 올라가는데, 거의 80도에 다다른다고 한다. 모래찜질을 하고 누워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어쩌면 살아가는덴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나을지도. 사실, 우리가 이부스키까지 온 이유는 모래찜질 때문이 아니라 슈스이엔이라는 료칸에 묵기 위해서였다. 이부스키 바닷가에 자리한 슈스이엔은 온천도 온천이지만 가이세키를 잘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프로가 선택한 일본의 호텔·여관 100선'에서 무려 32년째 요리 부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집이다. 우리는 가고시마로 떠나오기 전부터 슈스이엔의 가이세키를 꼭 먹어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료칸에 들어가 온천을 마치고 연회장으로 가니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나카이상이 특유의 호들갑과 함께 요리를 내오기 시작했다. 우유를 넣어 만든 두부, 게를 섞어 만든 젤리가 전채로 나왔다고 잘 숙성된 사시미가 뒤를 이었다. 흑돼지찜과 옥돔 타다키도 이어졌다. 흑돼지찜은 불필요한 지방을 제거하고, 고기의 부드러운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가현의 콩과 사쿠라지마의 무를 곁들여 쪘다고 했다. 옥돔 타다키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스르르 녹았다. 모든 요리는 맛이 넘치지도 않았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음식은 하나같이 그릇과도 잘 어울려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디저트가 나올 때쯤 오카미상이 들어왔고 박찬일이 물었다. "슈스이엔이 요리에서 최고로 꼽히는 비결이 뭡니까?" 오카미 상이 대답했다. "저희들은 손님을 파악해서 그 손님에 맞는 음식을 냅니다. 원래 가고시마 음식이 좀 단 편인데, 오늘은 손님이 한국 분들이라 단맛을 좀 줄였습니다." "요리사는 좋은 재료를 고를 줄 알고 맛을 잘 내야 하지만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일도 잘 해야 해요." 레이먼 킴이 말했다. "요리를 먹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고 만족시키는 건 맛이지만, 단지 맛있다는 것만으로는 감동을 주지 못해요. 감동시키기 위해선 맛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아마도 마음이겠죠." 유혹의 카페,백곰의 빙수 다음날 우리는 슈스이엔을 나와 가고시마 시내로 들어갔다. 가고시마는 인구 50만 정도 되는 도시다. 우리나라의 전주와 비슷하다. 가고시마 중앙역과 텐몬칸 주변이 번화가다. 기온은 한국보다 평균 4-5도 정도 높다. 가벼운 후드티 하나 걸치면 딱 좋을 날씨다. 하늘은 높고 푸르다. 시내에는 일본 특유의 레트로 스타일의 전차가 댕강댕강 종을 울리며 굴러 다닌다. 그대로 쏙 집어가고 싶을 만큼 예쁘다. 초록색 전차도 있고 노란색 전차도 있다. 덴몬칸 입구에 '블루라이트 카페'라는 멋진 카페가 있다. 70년대 풍이다. 하얀색 레이스가 달린 메이드복을 입은 종업원이 오래된 도자기 잔에 커피를 담아준다. 아침 식사세트를 시키면 커피와 샐러드, 잘 구운 토스트가 쟁반에 담겨 나온다. 가고시마 사람들은 이곳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며 아침식사를 한다. 물론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담배를 끊은 지 8년이 됐는데, 처음으로 이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덴몬칸은 아케이드 거리다. 거리 양편으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길을 지나는데 오전부터 학생들로 북적이는 상점이 있어 고개를 기웃하니 '시로쿠마 빙수 가게'다. '하얀 백곰'이라는 뜻의 시로쿠마. 가고시마에서는 흑돼지와 소주 못지 않게 유명하다. 지금 우리가 먹는 팥빙수의 원형은 1950년께 일본 가고시마의 한 찻집에서 잘게 부순 얼음에 연유와 단팥, 과일을 얹어 판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시로쿠마라는 이름도 하얀 우유 빙수에 박힌 단팥과 건포도가 북극곰을 연상시킨다해서 붙었다. 봤으니 지나칠 수 없는 일. 빙수 가게 들어가 빙수 하나를 시켰다. 한 숟가락 입 속으로 가져가니 그 달달함에 잠시 행복감이 인다. 어쩌면 이게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다가 지루해지면 여행을 떠나고, 달달한 빙수 한 숟가락을 먹으며 설핏 미소를 짓는 일. 숟가락으로 빙수를 푹 푹 찌르고 있노라면 인생이란 별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잘 것 없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인생이란 게 꼭 커다란 이념이나 지고지순한 사랑, 엄청난 부와 명예 같은 걸 이루어야 제대로 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냥 즐거운 음악을 듣고 달콤한 빙수를 떠 먹으며 틈틈이 여행이나 다니는 인생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B급의 반전 빙수 가게를 나와 점심으로 또 뭘 먹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선택한 메뉴는 '온타마란돈'. 일본에는 'B급 구루메'라는 것이 있다. 서민들이 즐겨 먹는 지역의 음식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들어진 것으로, 말 그대로 A급이 아니라 B급이다. 철도 도시락인 에키벤에서 시작된 음식 체험 열풍이 B급 구루메를 거쳐 지금은 고도치 구르메(그 지역의 음식)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 온타마란돈이란 야가와에서 생산되는 고구마 달걀을 천연 스나무시(모래찜질)로 삶아낸 다음 가고시마 흑돼지구이와 함께 밥에 올려먹는 덮밥이다. 밥 위에 올려진 계란 노른자가 터지면서 밥과 재료들을 섞어준다. 가고시마 시내에 덮밥 집이 많은데 집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온타마란돈을 만들어낸다. 가고시마의 고구마 맥주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점심을 먹고 '메이지 구라'라는 소주 공장으로 향했다. 가고시마 특산품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고구마 소주다. 가고시마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는 한해 32만톤. 전국 1위를 자랑한다. 가고시마 사람들은 이 고구마를 이용해 소주를 빚었다. 가고시마 현 내에서만 113곳의 양조장이 있고 1,500종류의 소주를 생산한다. 일본인들은 사케는 사케이지만 가고시마에서만은 사케는 곧 소주를 말한다. 고구마 소주는 알코올 도수 25도의 증류주다. '메이지 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메이지 유신 때 만들어진 소주 제주법을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해 소주를 빚고 있는 가고시마 최대의 소주 공장이다. 이 회사는 '시라나미'(白波) 소주로 유명하다. 쌀누룩에 최상급 가고시마 고구마를 잘 섞어 약 10일간 숙성시켜 만든다. 양조장을 직접 견학해볼 수도 있는데 들어서자마자 달짝지근한 고구마 소주 냄새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100년 된 항아리가 도열한 모습엔 그들의 장인정신이 엿보인다. 쌀 누룩에 고구마를 넣어 발효시킨 후 증류한 소주를 이 항아리에서 3개월 정도 숙성해 출시한다. 우리는 양조장 내 식당에서 소주를 시음했다. 일본인들은 소주를 주로 물에 타 마신다. 따뜻한 물을 섞어 마시는 걸 '오유와리', 찬물에 마시는 방식을 '미즈와리'라 한다. "아무래도 소주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면 오유와리가 좋겠지?" 박찬일이 이렇게 말하며 잔을 청한다. 잔으로 코 끝에 대니 그윽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한 모금. 입안 가득 퍼지는 고구마향. 목 넘김도 부드럽다. 이 회사에서만 50개 제품을 생산한다. 100년 전 소주를 재현한 제품도 있다. 메이지 구라를 나와 다시 시내로 갔다. 흑돼지 샤부샤부를 먹기 위해. 한국인에게 돼지고기 샤부샤부는 아직 익숙치 않다. 돼지고기를 샤부샤부로 먹는다고 하면 일단 갸우뚱한다. 사실 일본에서도 돼지고기 샤부샤부는 생긴지가 얼마 되지 않은 음식으로 가고시마 흑돼지의 부드러움을 보여주기 위해 근래에 들어 만들어졌다. 로스와 갈비, 삼겹살 부위를 샤부샤부로 먹을 수 있는데, 지방이 같이 잘 섞여 있어 살코기로만 하는 것보다 더 부드럽다. 잡내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셔도 될 듯. 우리나라 '대패 삼겹살'처럼 얇게 썬고기 한 점을 육수에 살짝 데친 후 입 속으로 가져가면 눈 녹듯 스르르 녹아 내린다. 다시마로 다시를 낸 육수에 야채를 넣고 끓이고, 얇게 썬 돼지고기를 살짝살짝 흔들어 데쳐먹는데, 특제 간장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맛이 더 좋다. 샤부샤부 국물까지 떠먹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건더기만 건져 먹는다. 우리가 간 곳은 '쿠마소테이'라는 식당으로 가고시마에서 흑돼지 샤부샤부로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하나다. 인생은 짧으니까! 샤브샤브를 먹고 나오니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2차를 가기 위해 술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우리 역시 이대로 호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한 잔 더 해야지?" 박찬일이 말했고 레이먼 킴은 "그래야죠"하며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가고시마중앙역 앞은 밤이면 왁자지껄한 포장마차촌이 문을 연다. 야타이무라(屋台村)라는 곳이다. 야타이(屋台)는 일본식 포장마차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마을을 뜻하는 무라(村)가 붙었으니 포장마차촌 정도 될 듯. 모두 25개의 점포가 모여있는데 신선한 제철 생선은 물론이고 꼬치, 돼지고기 요리, 라멘 등 지역을 대표하는 먹거리들을 안주 삼아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와 맥주 등을 즐길 수 있다. 건물들이 마치 드라마 세트장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가게 앞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있어 일본 거리 분위기를 한껏 즐기며 기분좋게 마실 수 있다. 오래 앉아서 마시기는 좀 불편하고 분위기를 즐기며 한 잔 가볍게 걸치기에 좋다. 하지만 음식이 그다지 수준 높다고는 할 수 없다. 그냥 분위기를 즐기며 생맥주나 소주 한 잔 마시기에 적당한 정도다. 가고시마를 여행하는 일본인들도 많이 찾아든다고 한다. 정말 추천하고 싶은 곳은 가고시마 시내에 자리한 '유도우후곤효우에'라는 이자카야다. 온천물로 끓여내는 두부전골과 꼬치 등을 파는 곳. 모든 좌석이 바에 앉게 되어 있다. 생긴지는 60년 정도. 처음 생겼을 때와 메뉴가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한다. 자리에 앉으면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가 술을 따라주고 안주를 직접 내준다.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는 곳이다. 우리는 온천두부전골 하나를 시켰다. 냄비 속에는 두부가 푸짐하게 담겨 있고 쑥갓과 콩나물이 그득하게 올려져 있다. 밤이 점점 깊어간다. 냄비가 보글보글 끓고 있고 우리는 따뜻한 오유마리를 시킨다. 할머니가 넘칠듯 소주를 따라준다. 이것저것 꼬치도 시킨다. 옆에 앉은 일본 할아버지가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묻는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렀어요." 할아버지는 "난 여기 20년째 단골인데 온천두부 맛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최고야"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우리는 천천히 오유와리를 마신다. 삶이 소모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먹고 마시는 것이다. 따뜻한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잘 구운 생선살을 발라먹다 보면 그럭저럭 인생이 견딜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는 가고시마의 어느 구석진 이자카야. 손님은 쉴 새 없이 들락거리고 문 밖으로 트램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두 요리사에게 물어본다. 왜 요리를 시작하게 됐는지. "뭐 꼭 거창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 요리를 시작하게 됐고, 요리를 하다보니 요리사가 된 거죠. 요리사로 살다보니 요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고요." 레이먼 킴이 말했고 박찬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인생은 짧으니까, 그래서 맛없는 음식을 먹기엔 아까운 것이 인생인 거지." 주인 할머니는 조용히 빈 잔을 채워주었다. 글│최갑수사진│최갑수 artravel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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