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 그대로의 지구

날 것 그대로의 지구ICELAND TRACKING하이랜드│아이슬란드│정양권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 아이슬란드 동쪽에는 중세시대까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지. 그래서 옛사람들은 대신 상상의 동물 용이 산다고 믿었던 거야. 한편, 북쪽에는 빙하가 만든 협곡-피오르가 많아서 깎아지는 절벽 천지였지. 섬에 유일하게 독수리가 주인인 지역이었어. 서쪽은 지금의 수도 레이캬비크가 있는 곳이야. 오직 여기만이 사람이 살기 적합한 기후와 땅을 내준 곳이지. 남쪽은 산악지대, 설인들이 이곳에 살며 사람들을 잡아먹었다고 해. 지대가 높아 아주 추운 곳이었거든. 사람들이 추위에 많이 얼어 죽었어. 그래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믿었지. 아이슬란드- 동쪽에는 용이 북쪽에는 독수리가 서쪽에는 황소가 남쪽에는 거인이 지키고 있는 땅 인간의 행동이 역사를 만들었다면, 인간의 마음은 신화를 만들지. 대부분의 신화는 그 땅의 지리에서 탄생해. 살아온 나이만큼 다양한 이야기. 귀 기울여 보면 들리는 땅의 목소리. 이제 우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 아이슬란드를 헤맬 예정이야. 백팩 속에 신화를 담으러. 날 것 그대로의 천지 여름이라 믿을 수 없는, 얼음장 같은 공기에 눈이 떠졌다. 나는 지금 하이랜드라 불리는 아이슬란드 남쪽 이름 모를 산속을 헤매는 중이다. 침낭 속 몸은 괜찮다. 침낭 밖 얼굴은 무방비다. 손에 잡히는 고어텍스 자켓으로 얼굴을 둘둘 말아 애써 찬공기를 막아 보지만 숨이 막혀 5분 이상은 힘들다. 아침이라 그런 건지, 이상하게 텐트 안과 밖 공기의 온도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기분 탓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마음의 위안이라도 되게. 백야의 끝 무렵이라 해가 지지 않는데도 이 나라에선 태양 보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붉은 일출 대신 몽실몽실 회색 구름들이 나를 반긴다. 하이랜드의 아침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가방에는 빵과 쌀, 분말가루 죽, 라면이 있다.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조합을 떠올리며 가방을 뒤적거리지만 헛되다. 없는 재료가 갑자기 생길 리 만무하고, 인스턴트 음식에 있어봤자 얼마나 많은 조리법이 있을까. 결국 오늘 아침도 죽이다. 추운 밤을 견디다 보면 무조건 따뜻한 게 최고다. 밥은 그냥 귀찮다. 라면은 아무래도 저녁이 제격. 어제 소고기죽의 참패로 장조림이 야채죽 구원투수로 나섰다. 장조림과 고추참치는 항상 옳았고 오늘도 그랬다. 길을 떠나기 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아침산책에 적합한 동산을 발견했다. 후다닥 길을 오른다. 지난밤 혹여 놓쳤던 순간들은 없었는지, 보지 못했던 풍광은 없는지. 얼음섬의 여름, 아직도 한창 성장통을 겪고 있는 하이랜드에 언제 다시 오겠냐 말이지. 프리미엄 공기를 힘껏 들이 마시며 동산아래 사람들을 조용히 구경했다. 아침엔 모두들 분주해 보인다. 얼음물로 덜 깬 눈을 사사삭 비비며 세수를 한다. 어제 입었던 옷을 먼지 한번 털고 당연한 듯 다시 입는다. 그리고 속전속결, 무념무상으로 집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어디론가 이사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매트와 텐트를 돌돌 만다. 가끔, 방법을 알아도 잘 말리지 않을 때가 있다. 과신과 게으름 사이의 어떤 문제인지 약간 속상한 마음이 들지만 어쩌겠는가. 될 때까지 한다. 오늘도 어디론가 떠나야 했기에. 이번 백팩킹으로 아이슬란드 방문횟수는 5번을 기록했다. 첫 번째는 의욕만 앞선 단기 봉사자로. 두 번째 역시 의욕으로 무장한 장기 봉사자로. 세 번째는 프로냄새가 아닌 사람냄새 가득한 사진 선생님으로. 네 번째는 1만km 연애 중인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 그리고 다섯 번째. 사랑했고 앞으로 쭉- 사랑할 아이슬란드를 만나러 지금 이곳에 와 있다. 도합 1년여의 대장정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아이슬란드라는 공간이 주는 매력적인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적어도 지난 1년간 나는 아이슬란드에 완전히 미쳐있었다. 운과 운 사이 스톡홀름 비행기 연착을 시작으로 생겨난 불미스러운 사건들- 수화물 불착, 핸드폰 먹통, 한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태양열 충전기 박살. 그러더니 이번에는 트레킹 하루 만에 얼음바닥으로부터 온기를 지켜낼 에어 매트에 바람이 드나든다. 완전 방수라고 믿고 신고 온 내 신발은 어제 10Km 가까이 되는 눈길을 헤쳐 와선지 아직도 축축함이 깔창에 남아 있다.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불량이 아니라 믿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전에 너무 많은 운을 한번에 써 버렸던 탓인가? 나를 둘러싼 모든 운이 주인을 버린 채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게 하나 있다. 트레킹 중 비는 거짓말 같이 밤에만 지나 다녔다. 한류와 난류가 섬 주위 전체에서 진한 만남을 갖는 곳, 얼음섬에서 비구름은 차라리 친구 같은 존재라 오히려 없는 게 더 부자연스러운 기분이랄까. 하루에 적어도 한번쯤 잠시 잠깐 인사라도 나눠야 오늘 내가 지구 반대편 섬나라에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다행히 트레킹을 하는 중간에 비를 만난 적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날씨 운만큼은 최고다! ...라고, 날씨의 배려에 감사하던 찰라. 톡, 톡. 얼굴에 물이 튀었다. 뭐지? 손을 벌려 하늘을 쳐다 보니 비다. 비가 온다. 알록달록 지면의 민낯은 조금씩 변해갔고, 마침내 회색구름이 온 세상을 덮어버린다. 길 위의 풍경은 익숙하지만 처음인 듯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대지가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빗줄기는 얇은 불투명 커튼을 만들었고, 점점 거세져 갔다. 저 멀찍이 앞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묵묵히 나를 인도하던 커플은 이내 시야 속에 사라진다. 길 위에 혼자라는 사실이 불안감을 안겨 준다 요정들의 집 불안함이 점점 커져가고 있을 때. 저기 멀리 멋스런 조명 아래 하얗게 빛나는 물체가 눈에 들어 왔다. 바위였다. 이상하게 생경하고, 이상하게 아름다운 바위! 물론 난 바위를 처음 본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고작 바위 같은 걸 이렇게 절절하게 독대한 경험은 전에 없었다. 커다란 박물관 같았다. 그것도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입장료를 요구하지 않고, 관람시간을 제한하지도 않는. 지키는 관리인도, 사진촬영 금지 팻말도 없는. 심지어 관람객이 원할 때 언제든지 만질 수도 있었다.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섰다. 한참을 바라 보았다. 박물관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내가 맡고 있는 문화재 관련 업무의 특성상,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박물관을 제법 잘 드나들었다. 하지만, 사실 박물관의 유적을 마주할 때면 박제된 인공물의 느낌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힘들었다. 흐르는 세월 속 지키던 자리가 아닌 곳에 보존과 보호의 이름으로 인공호흡기를 반강제적으로 입에 채워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하이랜드에서 내 눈에 든 바위는 온전히, 오롯하게 자연 속에서 스스로 빛났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이렇게 엉뚱한 곳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는 바위를 엘프스톤이라 부른다. 다른 말로 엘프들의 집. 그래서 건설현장마저도 엘프스톤을 보호하며 토지를 기획하고 관리한다. 아이슬란드인들이 엘프스톤을 신성시 했던 건, 그것들이 보여준 원형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엘프스톤이 지금 자리하고 있는 그 위치와 공간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으리라. 이 귀함을 아는 것이다. 자리는 사실 매우 중요하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때부터 자신의 빛과 색을 잃게 된다. 두 번째 강 더 깊고 넓은 강이 앞을 가로 막고 있다. 덜컥 겁부터 난다. 건너고 나면 별거 아닌데 건너기 전엔 항상 겁이 난다. 이미 누군가가 건넜던 강이리라. 그게 내게 가장 큰 힘이 된다. 세상을 마주할 때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 얼마나 될까. 또 완전히 익숙한 일들은 얼마일까. 알고 보면, 낯설지만 실은 낯설지 않고, 익숙하지만 동시에 조금 새로운 세상에서 우린 살고 있다. 오늘도 난 그렇게 겁나는 강을 건넌다. 나보다 앞선 사람들을 믿고, 동시에 나만의 방법을 지키며. 너를 끌어당기는 것들 얼음 섬의 가장자리 헤스테리에서 그를 만났다. 텅 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린 수줍게 인사했다. 그는 부론이라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왔다고 말했다. "난 부론에서 태어났어. 마치 작은 아이슬란드 같아. 그리고 그건 내겐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야." 그는 시골 깡촌 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사내였다. 이제 막 나온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고향을 떠나 대학을 베른에서 다녔어. 스위스의 수도. 그런데 내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더라. 무슨 지켜야 할 규칙들이 그렇게 많은지.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고 스스로 만든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 같았어. 학교를 졸업해야 하니까. 도시의 삶을 바짝 쫓아가다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할 때쯤 마치 비상구로 탈출하듯 아이슬란드를 찾게 되는 것 같아. 벌써 이번이 3번째 여행이야." 우리는 이곳에서 유명한 팬케이크를 하나씩 더 주문 하고, 당을 충전하며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는 아이슬란드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이 매번 그를 이곳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곳의 공기는 좀 특별한 것 같아. 호흡 하나 하나. 숨쉴 때마다 이제 막 태어난 공기 같거든. 아이슬란드는 정부로부터 기계유입이 철저히 통제 되면서부터 적극적인 자연 보호를 받고 있는 지역이잖아. 가만히 숨 쉬는 것만으로도 아이슬란드에 온 비행기표가 아깝지 않지. 두 번째는 바로 물! 아이슬란드를 제외하고 세계 어디에서 바닷물을 뺀 흐르는 모든 물들을 의심 없이 마실 수 있겠어?" 그는 다음으로 낯설고 풍족한 시간을 꼽았다.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아서. 겨울에는 해를 보기가 쉽지 않아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개념의 가치와 기준이 이곳에선 많이 흐려진다고. "나는 적어도 지금 아이슬란드에서 지내는 동안만큼은 알람을 꺼놔. 대신 스위스에서 보단 조금 이른 저녁에 잠이 들지. 그리고 내 몸이 필요로 하는 만큼 잠을 자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그게 이른 새벽이든, 한 낮이든, 혹은 하루가 지나가도 상관없어." 적어도 시간이 잠시 멈춰 가는 아이슬란드에서 만큼은 자신의 몸이 바라는 대로 실컷 시간을 허락할 수 있어 좋다며 그는 따뜻하게 웃었다. 시시콜콜한 우리의 아이슬란드 이야기는 서로의 가방에서 지금까지 어렵게 지켜왔던 비상식량을 꺼내 게걸스럽게 먹으며 끝이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한국인과 스위스인의 진득했던 얘기를 카페 주인 내외는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오래 듣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날은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백퍽커 누군가 카페 앞 바다에서 고래 한 마리를 보았다며 좋아했던 날이기도 하고, 또 다른 배낭여행자는 짙은 안개 속 낭떠러지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카페로 찾아 든 날이었으며. 비현실적인 풍경에 눈이 먼 다른 백팩커의 헬기조난사고 소식이 들렸던 날이기도 했다. 아이슬란드를 사랑하는 여행자들의 좋고, 흐리고, 평범하고, 특별한 그런 날들. 이런 날 누군가 내게 아이슬란드를 왜 사랑하냐 물어 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이곳은 나를 너무 쉽게 행복하게 만들어. 아무렴 좋아, 설사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도. 글│정양권사진│정양권 artravel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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