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네치아의 조각들베네치아│이탈리아│레이케이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이미 널리 알려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베네치아 만 안쪽의 석호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자 박물관인 도시. 구시가지는 지난 시대의 번영을 기억하며 산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 아카데미아 미술관 등 미술, 건축예술의 보고로 남아 있다.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시작된 베네치아는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며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했다. 십자군 원정에 힘입어 동방으로까지 무역을 확대하면서 14-15세기 초에 베니스의 상인들이 쉴 틈 없이 곤돌라로 물을 가르는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후로 500년. 침체기와 쇠락기와 있었지만 현재는 예술과 문화, 그리고 부를 가진 이탈리아 3대 관광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섬들 사이의 수로가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이 특별한 도시를 보존하기 위해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물과 시간의 인사기차역에서 밖으로 나오자 상상만 했던 베네치아가 그 모습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녹색 물빛과 예쁘게 나이든 고 건축물들의 풍경. 물이 조용히 돌기둥을 때리는 소리와 거부감 없는 물 냄새가 오감을 자극한다. 흐르는 물과 배들, 아기자기한 건물들은 곱게 때가 타 있다. 화려한 가면을 파는 가게, 아기자기한 유리공예 가게(어떤 금 휘장의 와인잔은 내 배낭을 통째로 팔아도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넘어가는 과자가게와 종류를 다 알 수 없는 수백 병의 술이 가득한 술가게가 이 도시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베니스 상인들의 촘촘한 쇼윈도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물처럼 흐른다. 숙소 자판기에 있는 달달한 우유를 뽑아 들고 2층에 위치한 베란다에 앉아 내려다보는 골목 풍경. 잔뜩 활기찬 사람들의 몸놀림과 설레는 얼굴들이 쉴새 없이 지나간다. 불쑥불쑥 예고 없이 다리 밑 운하로 튀어나오는 자그마한 곤돌라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제자리에서 베네치아를 즐겨도 좋았다. 수많은 다리와 골목으로 이루어진 미로 같은 베네치아를 맘껏 헤매기 시작했다. 분홍, 와인 빛으로 세월 묻은 벽돌들, 배들을 정박시키기 위해 수없이 박아놓은 나무들에 낀 초록색 이끼, 브러쉬로 그린듯한 물때를 발견한다. 용도와 모양이 각기 다른 배들은 쉴새 없이 물을 가른다.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없으므로 버스(바포레토) 정류장도 물 위에 동동 떠있다. 다리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장미로 가득 장식한 카페. 그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신사들, 커피를 마시는 여인들이 한낮의 태양을 즐기며 여유를 부린다. 햇살이 비스듬히 누워 들어오는 시간, 물은 베네치아를 묶어서 잔잔하게 흔들리는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 그림 어딘가, 다리 위에 있는 한 소년, 소녀의 실루엣에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 소년은 아름다운 말을 하고 싶고, 소녀는 아름다운 말을 듣고 싶다. 그래서 사랑은 주로 물가에서 이루어진다. 온갖 삶의 풍경들골목골목을 깨끗하게 청소하듯 돌아본다. 진짜 베네치아 사람들의 풍경, 가장 솔직한 속살이라면 틀림없이 건물 뒤편, 골목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것 같은 골목 안에서도 베네치아 사람들은 창문에 반드시 꽃을 내건다. 별생각 없이 걸어두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웃들과 색깔을 맞춘다. 아니 그 건물의 옆 건물과도 조화를 고민한다. 분홍색 건물 벽에 페인트가 벗겨져 와인색이 돌면 와인색과 흰 분홍색 꽃으로 장식한다. 옆 건물의 차양막이 녹색이면 우리 집 가로등을 같은 색으로 칠하고, 블라인드는 옆집 벽색으로 맞춰둔다. 모르겠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겠지만 덕분에 베네치아의 건물들은 이질감 없이 한 송이의 꽃으로 물위에 피어있고 자연스레 이 도시는 꽃다발이 되어 혼미할 정도로 낭만적이다. 제 아무리 베네치아라도 완벽이란 없을 것이다! 일부러 어두컴컴한 담벼락 옆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 발이 닿지 않을 건물 틈새에도 자그마한 운하가 흐르고, 그 위는 돌로 된 다리가 반드시 연결해준다. 다리 밑에는 잔뜩 신이 난 노부부를 태운 곤돌라가 지나간다. 결국 베네치아. 노부부의 주름진 미소는 모두에게 번져갔다. 색을 골라 칠한 듯한 낡은 벽돌들 사이로 창이 뚫려있다. 창문으로 몸을 내밀면 쉽게 물을 만질 수 있을 만큼 그들은 물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저기, 반쯤 물에 잠긴 낡은 대문들. ‘작품' 베네치아는 실제로 조금씩 아드리아해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속도라면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을 때 베네치아는 곤돌라들이 금은보화를 뿌리며 건설한 또 다른 아틀란티스라며 손주들에게 전해질지 모를 일. 돌다리 위에서 잠깐 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데 곤돌라를 모는 사내가 물로 V를 그리며 다가와 크게 손짓하며 부른다. "어이, 자네들! 이 나이스한 곤돌라 한번 타보지 않겠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타지요" 정중히 말씀 드리자 "다음에? 어이 젊은이! 이 순간이 그대 인생에서 가장 Best한 순간이라고!" 건물들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튕겼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노란색 건물아래 노란색 메리호, 그 위에서 아저씨가 부단히 짐을 옮긴다. 노란 메리호는 아저씨에겐 그저 자가용, 누군가에게 로망일 장면이 아저씨에겐 일상이다. 이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머리를 휘날리며 출발한다. 메리호가 그린 흔적을 따라 걷다가 인적이 드문 다리에서 호주에서 온 신혼부부를 만났다. 배낭을 잔뜩 메고서 다가온 뒤 나에게 포토그래퍼냐고 묻는다. 내 몸에 걸려있는 커다란 카메라와 렌즈 때문이다. 짧게 머뭇거리다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손뼉을 딱 치더니 뭐라 설명도 없이 본인의 카메라를 내게 쥐어준 뒤 다리 위로 와이프와 올라간다. 이렇게 된 이상 이번 여행에서 가장 신경을 써서 사진을 찍게 된 거다. 연신 땡큐를 외치며 내려오던 그들에게 내 카메라로 한번 더 찍어도 되겠느냐 물었다. 행복한 미소와 함께 고맙다고 인사하는 부부에게 내가 더 고맙다고 답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 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시끌벅적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오밀조밀 하게만 보던 베네치아를 넓고 탁 트인 시야로 보게 되었다. 저 멀리 강 건너 색깔 별로 정리된 집들이 서있고, 타이타닉 같은 거대한 유람선도 지난다. 그사이 생업으로 물고기를 잡는 아저씨들이 빠르게 오가고, 어린아이들은 놀이를 위해 작은 배를 타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운이 좋으면 곤돌라 퍼레이드를 관람하고, 곤돌라 경주를 구경하기도 한다. 선착장으로 박아놓은 나무기둥들 사이로 곤돌라가 지나가면 자연스레 프레임을 만들며 좋은 사진을 선물한다. 과거 신분사회였던 베네치아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카니발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던 화려한 가면을 쓴 예술가들이 축제를 즐긴다.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은 중세건축의 걸작으로 불리며 웅장함을 뽐낸다. 무역의 중심지로 동서양의 다리역할을 했던 베네치아답게 동양과 서양의 중세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로 인해 베네치아 양식이라는 새로운 건축 양식이 탄생했다. 한때 베네치아를 점령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산 마르코 광장을 두고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란 표현을 했다. 그만큼 광장 일대를 주변으로 다양한 세계 각지 건축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산마르코 광장에 위치한 해리즈 바와 플로리안 카페는 괴테와 같은 문학가가 일부러 들려 영감을 얻었던 곳으로, 18세기 최고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를 비롯해 헤밍웨이 등의 이름 있는 작가들이 방명록을 남기고 간 명소다. 산 마르코 대성당 종탑 위에서 베네치아를 한눈에 담으면 해가 녹으며 빨갛게 석양이 지고 모든 건물들의 지붕을 같은 색으로 칠한다. 낮게 깔린 그림자가 광장을 채우는 시간에 맞춰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선율은 베네치아에서만 즐길 수 있는 가장 비밀스런 오케스트라다. 여기, 부라노를 가득히베네치아 본섬에서 부라노 행 유람선을 타고 40분가량을 이동했다. 부라노 섬에서 내리면 무지개 빛 색깔들이 차례차례 동심을 깨워준다. 어릴 적 새로 산 팔레트에 36색 물감을 순서대로 차근차근 짜내었을 때의 만족감이다. 이곳은 그렇게 색깔의 섬. 골목마다빈틈없이 화사한 색깔로 잘 칠해놓았다. 디즈니가 부라노 섬을 디즈니 월드 패밀리 리조트의 모델로 삼은 이유다. 하루면 충분하게 구경할 수 있는 크지 않은 섬이지만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기자기한 건물 쇼윈도에는 레이스 수공예품이 잘 전시되어 있고, 웨딩드레스, 테이블매트 등을 손수 만드는 할머니들이 무리를 지어 모임을 하는 장소도 둘러봤다. 관광객들은 줄을 선 채로 한화 2000원이 넘는 돈을 주고 향기 폴폴 나는 구식 화장실로 들어가고, 돈을 받는 할아버지는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무데스크에서 신문을 읽으며 쿨하게 휴지만 건네는 모습을 본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인도와 물의 거리가 가까워 인도에 앉아서도 섬을 가로지르는 운하에 발을 담글 수 있다. 두 발을 물 속에 쑥 집어넣고, 건너편 색을 맞춘 건물들과 블라인드를 구경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라노에 색을 칠한 사람은 한 사람의 아티스트일까, 아님 단지 개개인의 취향이 이런 멋진 조화를 이루었을까. 다즐링 블루(Dazzling blue)색 건물 외벽과 옆의 하얀 건물을 생각한 스트라이프 블라인드. 보색의 빨간 꽃들과 꽃에 맞춘 초록색 창문을 보며 이곳 주민들의 타고난 감각에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그러다 무심코 건물 색에 맞춰 내걸린 빨간 빨래와 속옷을 보고는 이건 분명 누군가에 의한 데코레이션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자그마한 생수병에 물을 뜨더니 놀이터로 혼자 달려가 그네를 타는 금발의 어린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이따금씩 이방인을 경계하고, 그네를 즐기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이곳에서 뛰어 놀며 자란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색을 알고 있을까. 손과 발이 물의 감촉을 알고, 물에 비친 하늘과 자신을 보며 자란 꼬마 아티스트는 훗날 어딘가에 또 다른 부라노를 그려낼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생각을 해본다. 해가 질 무렵에 언제 다시 올까 하는 생각과 함께 돌아섰다. 그렇게 나는 팔레트 안을 돌아다니며 이 색 저 색, 온몸에 다 묻혔다. 글│레이케이사진│레이케이 artravel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