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해변에서 길리, 인도네시아, 최갑수 어쩌면 사랑보다 여행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는 이제 곧 스무 살이 되고, 나와 기즈키가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 나이에 공유했던 것 중 어떤 것은 이미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건 아무리 한탄해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에서 여기는 인도네시아 길리라는 섬. 롬복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을 가야 닿는 아주 작은 섬이다. 이 다정한 섬은 푸른 하늘과 산호초가 부서져 만들어진 눈부신 해변, 해변에 게으르게 잎사귀를 늘어트린 야자수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자들은 이 섬에 오래오래 머물며 시간을 즐긴다. 맥주를 마시며 기타를 튕기고 노래를 부르며 아주 사소한 농담에도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스노클링을 하며 바닷속 물고기들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 삼판이라는 전통배를 타고 낚시를 나가는 이들도 있다. 마차를 타고 자그마한 다운타운을 돌아보기도 한다. 저녁이면 보랏빛 노을이 수평선 너머에서 번져온다. 이 섬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시간. 물결이 일 때마다 세상은 보랏빛으로 넘실댄다. 노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일까. 지구가 단지 단단한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노을이 물러가면 별이 뜨고 섬은 조용해진다. 어부들과 나무, 선인장들도 깊은 잠에 빠진다. 가끔 도마뱀들이 깨어 처마에 매달려 있기도 한다.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맑은 심장 박동을 들을 수도 있다. 우리를 위로하는 건 어쩌면 사랑보다 주말. 어쩌면 사랑보다 여행. 긴 하루를 보내고 밤바다에 홀로 앉아 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 별에 천사가 앉아 커다란 눈을 글썽이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안의 천사를 만나는 일, 내 속에 얼마나 많은 그리움과 떨림, 설렘, 몽상이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이 여행 아닐까.여행이 우리 삶을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가장 잘 보 여주는 게 아마도 여행 아닐까. 인생은 흐르고 흘러 지구 한 귀퉁이 길리라는 해변까지 왔다. 그동안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출판담당 기자로 일했고, 다시 여행담당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여행작가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십 년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한때 시를 썼지만 못 쓴 지 오래, 그 시절의 사랑이 희미해진 지도 오래다. 하루에 하루씩 꼬박꼬박 지나가는 하루를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살아와서 어느새 40대가 되어 이국의 먼 해변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이백의 '장진주'를 떠올리고 있으니.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君不見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回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스물한 살이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두 살이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마흔세 살이다. 두보 역시 "봄을 마음껏 보려고 하나 꽃잎은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고 했던가. 시간은, 세월은 그런 것이다. 화살처럼 빨라서 순식간에 지나간다. 명주실을 걸쳐놓은 듯 어슴푸레한 수평선. 별들은 파르르 떨리며 필사적으로 반짝이고 있다. 텅 빈 해변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자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지나온 날들이 저기 다 있다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 감정 앞에서 뭐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 미지근한 캔맥주를 따 마신다. 맥주를 마시다 문득 팽이를 닮은 타임머신이 바다 위로 불쑥 떠올라서 '타세요. 이십 년 전으로 데려다 드릴 테니. 가서 뭐라도 해보세요'하고 문을 스윽 열어준다면 나는 어떡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전 여기서 맥주나 마실랍니다'하며 캔을 들어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냉큼 올라타 그 시절로 돌아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사랑한다고 고백할까. 해변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세월은 여전히 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지금, 여기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지금의 인생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 봐야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며, 그다지 바뀔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도서관에 틀어박혀 문예지의 시를 필사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에 하루씩을 하루하루 살아낼 것이고, 마침내 오늘에 당도해 이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귀찮고 피곤할 것 같다. 그러니까, 대학시절 바다가 보이는 자취방 마루에 앉아 라면을 두 개씩 끓여먹으며 시집을 읽어대던 시절을 지나와 '뭐, 지금 뒤돌아보니 시고 여행이고 사진이고 아무것도 아니구만'하고 심드렁해하는, 곁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가끔 그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기념사진을 찍고 잡지에 산문 따위를 쓰면서 살고 있는 그런 시절에 당도했지만, 스무살 시절로 되돌아 갈 생각은 없다는 것. 생을 찬탄하고 긍정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하루를 버티고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가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뿐이다. 이만큼 살아보고 나서 깨달은 것이다. 청춘은 아름답지만 단지 지나가버려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주름살을 하나둘씩 챙겨가며 죽음을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래도 꼭 돌아가고 싶은 하루를 고르라면 이십 년 전 당신을 처음 만난 날, 그 하루를 선택하겠다. 온 세상이 환한 빛으로 휩싸였던 그날. 우리 아직 젊어서 서로의 살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그 시절. 또 하나의 시간은 대학 4학년 때, 스물다섯 살의 여름 어느 날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던 날. 나와 친구는 공항에서 베이징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나 나나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그토록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몰랐다. 버스나 기차처럼 표를 사서 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예약한 티켓을 보딩 패스로 바꾸고, 짐을 부치고, 공항 검색대를 지나야 했다. 출국심사대에서 여권에 도장이 쾅하고 찍히고 게이트 앞에 서기까지, 펭귄 두 마리는 뒤뚱거리며, 허둥대며 공항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다. 우리는 마침내 비행기에 올랐다. 아, 이게 비행기라는 거구나.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며 '이 쇳덩이가 정말로 하늘을 날아오른단 말이지'하고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륙 안내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는 누군가 커다란 고무줄로 튕긴 듯 슉~하며 앞으로 힘차게 달렸다. 아아, 그때. 난생처음 타 본 비행기가 지상을 벗어나던 그 순간, 중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그 느낌. 나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공항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날아가고 있어.' 그건 분명, 평생에 딱 한 번, 그 순간만 지을 수 있는 흐뭇한 미소였다. 어쨌든 지금은 한 달에 한두 번은 비행기를 타야 하는 직업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렇게 해변과 마주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면세점에서 산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며 비틀스를 듣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를 듣다가 빌리 홀리데이를 들었다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들었다가 콜드 플레이를 들었다가, 결국 다시 비틀스다. 살아갈수록 비틀스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데 딱히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그냥 좋아지는 것뿐이다. 예스터데이며 헤이 쥬드, 렛잇비... 젊었을 때는 수없이 들어도 밍밍하기만 하던 노래들이 지금은 이토록 따스하고 깊은 울림으로 귓전을 파고든다. 이 노래를 만들 때, 부를 때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월이 가면서 잃어버리는 것도 많지만, 얻고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좋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지기도 한다. 그전과는 약간 다른 세계에 서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우연히 스친 한 여자를 잊지 못해 밤새 그녀를 찾아 헤메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는데, 지금은 사랑은 누가 뭐라 하건 사랑은 그냥 사랑인 것 같다. 미지근한 것도 사랑이고, 차가운 것도 사랑이다.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할 건 아니다. 생각해 본다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낯선 호텔에 앉아 비틀스나 빌리 홀리데이를 들으며 위스키를 마시는 일. 떨어지는 유성을 바라보며 결국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 인생은 그런 것이다. 우리 몸을 지나갈 것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다. 원했던 것은 가졌고, 가지지 못한 것들은 포기했다. 그리고 남은 것이, 희미한 재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를 먹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가고,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 따위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하고 늙어갈 뿐이다. 코엘료 역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건 피로하다는 느낌.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뿐이지". 그래서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기엔, 한 곳에 머물러 살기엔, 아까운 것이 인생인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을 사랑하도록 하자. 열심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여행을 떠나자. 여기는 길리. 바다가 보이는 게스트하우스다. 글 │최갑수사진 │최갑수 artravel vol.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