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마을, 설국의 심장시라카와고 | 일본 | RAE 몇 해 전, 나는 페이스북을 뒤적이다가 기가 막힌 경치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고작 풍경사진 하나에 압도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나중에 결혼 할 사람과 함께 가서 그곳을 내려다보며 프로포즈를 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곳. 일본 기후현의 시라카와고다. 시라카와고로 가는 길 눈의 마을 시라카와고. 하얗고 두껍게 쌓인 눈을 지붕 머리에 얹은 목조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다. 마치 애니메이션 '월령 공주'에 나왔던 작은 마을과 같은 느낌. 언덕에 올라, 이 마을을 내려다보며 프로포즈를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의 사랑을 약속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장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듬해 연말, 나는 거짓말처럼 아내 될 사람과 함께 시라카와고로 향하고 있었다. 시라카와고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오랜 세월 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온 산악 마을이다. 많은 적설량으로 가옥들의 지붕 모양이 매우 독특한데, 199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 되었고, 현재까지 많은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런 보물 같은 곳이 가까운 일본에 위치해 있는데도 아직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니! 그래서 내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시라카와고는 오사카, 나고야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큰 도시 어느 곳에서 출발하더라도 굽이굽이 힘든 여정을 거쳐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어떻게 가도 멀고 험한 길. 가는 길이 힘들수록 목적지에 대한 기대는 커져가는 법이다. 우리는 간사이 지방 오사카역에서 출발하는 루트를 택했다. 오사카역에서 카나자와역까지 기차로 3시간, 카나자와에서 시라카와고까지는 버스로 2시간을 가야 하는 여정. 멀리 돌아가는 길이어서 그런지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생경했다. 여담으로, 나는 여행지를 정하면 그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선택하고 가는 내내 수없이 반복 재생해서 듣곤 한다. 특정한 음악에 여행의 기억을 덧입히는, 이를테면 나만의 여행습관이다. 시라카와고 같은 경우에는 Daishi Dance의 <Snowdayz> 가 나의 BGM이 되었다. 신비롭고 평화로운 설원에 고요하게 바람이 드는 느낌의 도입부를 지나 비트가 빨라지며 내 심장도 따라 두근두근 소리를 낸다. 아내의 손을 가만히, 꼭 잡았다. 國境の長いトンネルを拔けると雪國であった. 夜の底が白くなった.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너무나도 유명한 일본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물론 시라카와고와는 전혀 관계 없는 곳을 묘사한 문장이지만,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느낀 나의 감정은 실로 동일했다. 실제로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하얀 빛이 버스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 안 승객들은 일본인 특유의 얌전하면서도 분명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승객들은 모두 어쩌면 이 장면, 이 시간을 위해 그 먼 길을 돌아 온 것인지도 몰랐다. 와다야 가게의 시간들 눈앞에 펼쳐진 시라카와고는 역시 사진으로 봤던 것처럼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외딴 마을이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하얀 눈 산이 시야에 걸쳐 있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은 방금 지나간 발자국도 금세 하얗게 지워버린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찾아 갔다. 사실 지도도 마땅히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일본어로 손짓 발짓하며 겨우 물어 물어 도착한 '와다야'라는 이름의 작은 민박집. 시라카와고의 민박집들은 전부 갓쇼즈쿠리라고 불리우는 전통 가옥이며, 모두 지어진 지 100년이 훌쩍 넘었다. 아마도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주인장들이 그곳에 살고, 관리를 하며 국가의 지원금으로 민박을 함께 운영 하는 듯 보였다. 인터넷 예약 시스템이 전무한 시라카와고는 마을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민박집 리스트를 보고 일일이 전화를 걸어(물론 일본어로) 구두로 예약을 해야 하는 방식이었다(특히 연말 시즌에는 적어도 세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와다네 가게' 라는 뜻의 와다야 민박집 주인은 당연하게도, 와다상. 체구가 매우 작은 와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전통 가옥에서 주인장이 직접 차려주는 가정식을 먹고, 그 뒤에는 코타츠에 앉아 실컷 귤을 까먹으며 몸을 녹이다 그대로 다다미에 누워 잠드는 저녁을 보낸다는 것. 그것은 호텔에서 받는 깔끔한 서비스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경험이다. 그래도 외국인들이 제법 다녀갔는지, 와다 할아버지는 구글 번역기를 써가며 우리와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한 마디라도 서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기술의 도움을 조금만 받는다면, 언어는 더 이상 여행의 장벽이 되지 않음을 느꼈다. 영하의 날씨와는 달리 실내에는 훈기가 느껴졌다. 시골 할머니댁이 연상되는 따뜻한 습도가 피부에 와 닿았다. 집의 긴 복도를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쾌쾌한 목조건물 특유의 향기도 마음 어딘가에 와 닿았다. 그 집을 반질반질하게 쓸고 닦으며, 집과 함께 늙어간 할아버지의 세월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식당 한쪽 벽면에는 그 동안 이 집을 다녀간 일본 유명 인사들의 사진들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집을 가꾸고 손질하는 일이 할아버지에겐 매우 커다란 사명이었을 것.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알려주신 뒤, 좀 걸으러 밖으로 나가려는 우리에게 특히나 강조하시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クマ に注意してください. 곰을 조심하세요. 아, 프로포즈! 숙소에서 15분만 걸어가면 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현실과 단절된 이 곳. 꼭 영화의 미쟝센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내려 더욱 고요했고,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전해지는 뽀드득 소리만 귓가에 들려왔다. 입김은 그대로 얼어 붙을 것 같았다. 인간이 만든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리 속을 불현듯 스쳐가는 무엇! 아, 맞다. 프로포즈! 한 쪽 주머니에 미리 준비해둔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찰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마을 아래는 하얀 눈옷을 입은 전통가옥의 지붕이 올망졸망하게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이 여자와 나를 이 곳까지 이끈 한 장의 사진 그대로. 음, 아무리 절경이어도 이 풍경에 정신이 팔려 본 게임을 잊어서는 안되지. 어서 해가 낭만적인 각도로 지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 걱정스러울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버스를 타고 올라온 다른 관광객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고, 우리와 한 무리의 남자들만 남았다.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한기가 올라와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째 내가 상상했던 낭만적인 무드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지고 있다. 그 당시에 여자친구였던 나의 아내도 혹시나 곰이 나오면 어쩌냐며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보채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프로포즈는 일보후퇴. 2014년 마지막 날에 가장 멋진 장소에서 프로포즈 하려던 나의 계획은 이렇게 실없이 무산 되었다. 사전답사 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거행된 프로포즈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지도 몰라. 나 혼자만 아는 아쉬운 마음을 갖고, 결국 숙소로 그냥 돌아와 버렸다. 와다 할아버지 내외분이 차려주신 든든한 저녁을 먹고 뭔가 허무한 기분. 마을 중심에 있는 온천으로 가서 따뜻한 노천탕에서 몸을 녹이며 또 허무한 기분. 아, 몸은 물 속에서 살살 녹고 있었지만 머리는 쩡하게 시리고, 코는 빨갛게 얼어간다. 나는 그렇게 허무한 눈발을 맞으며, 그녀는 그렇게 노곤한 설국의 온천에 취해, 2015년 마지막 밤을 보냈다. 설국의 기억 시라카와고에서 맞은 새해 아침. 일본 가정식을 한 그릇씩 맛있게 비우는 것, 그리고 각자의 집으로 안부의 전화 한 통을 거는 것으로 시작했다. 밤새 내리던 폭설은 마을을 더 하얗게 바꿔 놓았고,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랬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시라카와고를 아시아의 알프스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깨끗했다. 어제의 아쉬움은 까맣게 잊고 파란 하늘과 맞닿은 지붕 위의 흰 눈에 정신이 팔려 카메라 셔터를 멈출 수가 없다. 이 각도 저 각도로 찍어도 흠이 없었다. 좀 더 골목을 헤매다 마지막으로 허름한 가게에 들어 따뜻하게 데워진 감주를 한 잔씩 나눠 마셨다. 두 볼과 코가 빨갛게 얼어갔지만 속으로 깊이 온기가 돈다. 기분까지 뽀얗게 씻어지는 듯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눈처럼 하얗게 웃는다. 정작 가장 중요한 프로포즈를 하지 못했지만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도 그녀를 향해 하얗게 웃었다. 오전 내내 이 작은 마을 곳곳을 둘러 보는 것 만으로 어느덧 떠날 시간. 세월이 한참이 지나도 부디 이곳의 고요한 모습이 변치 않길 바라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거짓말 같은 곳에서 맞이한 새해 아침은 앞으로 부부가 되어 살아갈 우리에게 조용히 남다른 의미를 건네줬다. 우리의 아기가 걸어 다닐 때쯤에, 다시 찾아 가보기로 할 만큼 좋은 추억이 남겨져 있는 곳. 고요한 설국 마을이 등 뒤에 하얗게 서있다. (혹시 궁금할 독자를 위해. 이후 서울로 돌아와 그때 못다한 프로포즈를 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라카와고에서 보낸, 눈처럼 뽀얀 시간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글│RAE(김항래)사진│RAE(김항래) artravel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