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축제처럼 살아요태국 | 방콕 | 박민우 인간은 모두 죽는다. 어머니 저는 이 말이 참 고마워요. 무섭기도 하지만, 고마운 마음이 커요. 끝이 있대요. 개학이 없는 방학이 즐거울까요? 끝이 있어서, 영원하지 않아서 삶이 즐거워요. 우리의 시간이 급속도로 닳고 있어요. 뭘 해야 할까요? 어떻게 시간과 맞서야 할까요? 일단 제가 머무는 방콕으로 오실래요? 우리 생에 허락된 케이크가 열 개라면, 그 열 개는 다 먹고 떠나도록 해요. 지구가 준 선물은 다 챙기야죠. 어머니! 어서 오세요. 시간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어요. 아들이 머무는 방콕, 많이 궁금하셨죠? 방콕에 오시겠다고요? 이모 둘과 함께요? 잘 생각하셨어요. 아들이 머무는 도시잖아요, 용기 내서 말씀 꺼내신 거 알아요. 품 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죠. 머리 크고, 중년의 나이가 되니까요. 아들도 어려우시죠? 눈치 보이실 거예요. 여행 경비는 걱정 안 해요.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려고요. 이모들과 매달 부은 곗돈, 저에게 미리 부쳐 주셨죠?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괜찮지 않은 거 눈치채셨던 거죠. 서둘러 돈부터 부쳐 주신 이유가 뭐겠어요? 그 돈으로 항공권도 끊고, 호텔도 예약할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 보잘것없는 아들을 두셨어요. 몇백만 원 우습게 쓰는 아들, 딸이 얼마나 많은가요? 저도 얼굴 화끈거리죠. 부끄러움 알아요. 어쩌겠나요? 떠돌이 글쟁이의 삶, 먼지처럼 가벼워져 버렸어요. 부끄러움도 가벼워졌어요. 속없는 놈이라고 욕하셔도 돼요. 어머니의 몸 안에 있을 때부터 전 아무것도 아니었잖아요. 탯줄에 연결되어 조몰락거릴 때도, 생각이란 걸 했을까요? 저는 여전히 제가 참 신기해요. 당신의 몸에서 제가 나오고, 두 몸은 어머니와 아들이 됐어요. 그때를 기억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절실하게 내 우주였고, 전부였던 어머니. 그 안에 웅크렸던 저는 호기심도, 불안감도 없었을까요? 가장 작은 공간이, 가장 아늑했겠죠? 창문 없는 방에서는 잠도 못 자는 제가, 그때는 평화로웠을 테죠. 신기해요. 믿기지 않아요. 빛이 들어오는방으로 골랐어요 방이 전부라는 마음으로 고르고, 골랐어요. 숙소가 좋으면요, 여행이 환해져요. 뭔가 안 풀리는 날도, 환한 방이 기다리니까요. 두 이모는 트윈베드가 편하겠죠? 새벽까지 조잘조잘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어요? 어머니는 여왕처럼 퀸사이즈 침대 독차지하세요. 저는 거실에서 잘래요. 그게 편해요. 둘이 자도 충분한 침대지만, 혼자 스마트폰 좀 보다가 한쪽으로 몸을 접고 잘게요. 서운하실 일이 아니에요. 단계를 밟아가는 거죠. 어머니 품이 전부였다가, 이제는 아니에요. 언젠가 영원한 이별도 할 건데요, 뭐. 모든 단계가 다 필요하고, 소중해요. 언젠가는 어머니 등에서 죽어도 안 떨어져서, 빨래도, 설거지도 업고 하셨다면서요? 이제라도 조금 자유로워지세요. 무사히 방콕에 오신 걸 환영해요. 비행기는 편안하셨나요? 비행기를 이렇게 쉽게 타는 날이 오다니요? 방이 마음에 드신다고요? 방도, 거실도 커서 좋으시다고요? 이 은은한 냄새는, 망고 냄새에요. 마중 나가는 길에 한 봉지 샀어요. 창밖에선 열대의 새가 지저귀고 있어요. 끈끈한 더위도 남 일이에요. 방 안에는 에어컨이 쌩쌩하네요. 전셋집에서 집주인 눈치 보며 살던 때가 기억나세요? 코끝이 빨개지는 추운 방이었어요. 연탄가스로 콜록대던, 미아리 그 집 말이에요. 아들만 둘이어서, 전세방 찾는 것도 큰일이었죠. 시끄러워서 안 된다. 집 더러워져서 안 된다. 집주인들은 사내아이 둘을 참 싫어했죠. 어머니, 여기는 방콕 5성급 호텔이에요. 베개에서 나는 세제 냄새를 맡아보세요. 한국 세제랑은 또 다르죠? 제가 골랐지만 참 잘 골랐어요. 제주도 건물주 친구 부러워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우리 건배해요. 얼음 동동 맥주로요 막내 이모와 저는 다섯 살 차이죠. 누나라고 부르면 어머니가 혼내셨죠. 여전히 누나 같아요. 놀기 좋아하고, 여행 좋아하는 멋쟁이 누나. 어쩌면 이씨 집안 세 자매는 식성도 닮았을까요? 쭈뼛거리지 않아요. 거침이 없어요. 태국 음식은 이미 다 맛있고, 다 먹어봐야 해요. 식당에서 인상 구기면서 젓가락 놓는 사람이 절대 아니죠. 그래요. 제가 어머니를 닮았고, 이모를 닮았어요. 남들이 보면 사이좋은 4남매로 보일 거예요. 행복하면 예뻐지고, 젊어지죠. 공항에서 시들했던 모습이 반나절 만에 사라졌네요. 어머니가 맥주를 그렇게 잘 드셨나요? 네, 태국은 맥주에 얼음을 넣어 마셔요. 동그랗고 뚱뚱한 얼음이 신기하세요? 찬 거 잘 못 드시지만, 신기하게도 목 넘김이 좋죠? 더위의 힘이고, 여행의 힘이죠. 천천히 오래오래 드세요. 드시고 싶을 만큼 드시고, 취하고 싶을 만큼 취하세요. 어머니로 살면서, 맘 놓고 취하지도 못하셨죠? 구멍가게 열고 남편, 아들 챙기랴, 살림하랴, 한숨 돌릴 시간도 없으셨어요. 오늘은 그러니까 좀 과하게 마시세요. 술주정도 좀 하시고요. 이런 날도 있어야죠. 건배, 건배! 일부러 말씀 안 드렸어요. 깜짝 놀라 주세요 아뇨, 아뇨. 숙소로 가기 전에요. 한곳 더 가야 해요. 일부러 말씀 안 드렸어요. 갑자기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으니까요. 제가 초보 가이드인 줄 아셨죠? 방콕 오는 친구들이 좀 많아야죠. 그 친구들 데리고 다니면서 요령도 늘었어요. 진짜 좋은 곳은, 시침 떼야 해요. 미리 알면 김빠지니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해요. 옥상이 거대한 술집이고, 식당이에요. 자, 여기예요. 마음껏 놀라세요. 입이 안 다물어지시죠? 하늘도, 땅도 온통 반짝이죠? 그래요. 방콕 야경은 별천지예요. 낮에 보았던 그 방콕 맞아요. 안 믿기시죠? 아예 다른 세상이죠? 죽순처럼 우뚝 솟은 빌딩들이 열심히 반짝이고 있어요. 어머니는 잘 모르는 미국 음악에 정신 사나우신가요? 여기도 미국 사람, 저기도 미국 사람. 신기하세요? 젊은이들만 가는 곳은 알아서 피하셨죠? 오늘은 저만 믿으세요. 내일도 올까요? 어깨가 들썩이면 춤도 추세요. 남은 술은 많고, 시간은 닳고 있어요.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남김없이 쓰기로 해요. 이 밤은 우리 거예요. 우리가 행복하지 않으면, 이 모든 반짝임은 의미가 없어요. 기억하세요? 창경원 슬픈 어린이 날이요 그때는 창경원이었죠. 창경궁으로 바뀌면서 놀이기구도, 동물원도 철거되었죠. 창경원은 서울에서 제일 좋은 놀이공원이었어요. 어린이날 모든 놀이기구가 공짜인 날. 그때 어머니는 저와 형, 그리고 두 이모를 데리고 창경원으로 향하셨어요. 놀이기구가 공짜인데, 우리만 왔을 리가 없죠. 서울, 경기도의 모든 아이가 창경원에 모였어요. 사람 사이로 걷는 것 자체가 위험하고, 불가능한 임무였죠. 그 재미없는 회전목마도 결국 못 탔잖아요. 어머니는 케이블카를 타자고 하셨죠. 케이블카는 도대체 뭘까요? 우주선처럼 하늘을 나는 비행물체인가요? 있긴 있는 걸까요? 뙤약볕을 그렇게 헤맸지만, 케이블카를 못 탔죠. 어린이날은 케이블카를 못 탄 날이 되었어요. 아니 아무 놀이기구도 못 탄 날이 되었죠.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두 이모는, 우리 어머니가 더 촌스럽다고 일부러 떨어져 걸었죠. 형은 목이 말랐고, 나는 다리가 아팠어요. 따로 걷는 두 이모, 업어 달라는 막내아들, 입이 오리처럼 나와 있는 큰아들. 참 더웠던 5월이었어요. 남들 다 싸 온 김밥도 없었던, 가난한 나들이였죠. 어머니는 구멍가게 사장님이면서 오란 씨 한 병이 뭔가요? 그걸로 다섯 명이 어떻게 마셔요? 가난은 어머니 죄가 아닌데, 우리는 모두 어머니만 원망했죠. 지금의 저보다 훨씬 어린 어머니였어요. 그 젊은 엄마는 창경원의 그날이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오늘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요. 아무도 촌스럽지 않죠. 꼭 붙어 있기로 해요. 가족이니까, 떨어지면 안 돼요. 누리지 못했던 걸, 한꺼번에 누리는 시간. 그게 여행이에요. 저만 누렸던 삶, 이제 같이 누려요. 우리보다 행복한 사람은, 지금 지구에 없죠. 어머니, 더 많이 웃어 주세요. 저를 위해서요 제 돈 주고 코끼리를 타본 적 없어요. 아니, 탈 생각도 안 했죠. 공포에 못 이겨 인간을 태우는 거잖아요. 죄 없는 코끼리를 때리고, 겁주는 거잖아요. 지구에서 가장 몹쓸 생명체는 인간이죠. 저는 죄를 짓기로 해요. 이런 합리화를 하죠. 우리가 아니어도 관광객을 태울 거고, 그렇다면 오늘 어머니를 태우는 게 코끼리에게 엄청난 불행은 아니겠지? 그래요. 저는 파렴치한 공범이죠.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조바심이 나서요. 어머니가 아이처럼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요? 눈 딱 감고, 반칙 한 번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타고 싶어 하시던 코끼리를 못 태워 드렸어. 그런 후회가 두려워요. 저는 주름 가득한 코끼리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유타야의 거룩한 탑들을 어머니와 돌았어요. 죄책감은 어디로 갔을까요? 뭉클하기만 해요. 어머니는 어린이날 왜 그렇게 케이블카를 찾으셨을까요? 그건 희망이었던 거죠. 새까만 인파를 피해야 했어요. 빈손으로 돌아올 순 없어요. 어떻게 시작한 나들인데요. 하나는 타야 한다. 꼭 타야 한다. 오기(傲氣)를 닮은 희망이었죠. 오늘은 어떤 하루인가요?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게 통증인 하루인가요? 시간이 아프도록 빠른가요? 어머니, 손잡이를 꽉 잡으세요. 떨어지시면 안 돼요. 가야 할 곳, 봐야 할 곳이 아직도 많아요. 모르셨죠? 저는 어머니를 여행했어요 코크렛이라는 섬으로 가 봐요. 대단한 섬 아니고요. 방콕을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인공섬이에요. 섬이라서 짧은 거리지만 배도 타고요. 자전거를 빌려서 작은 섬을 천천히 돌 거예요. 걱정됐어요. 일흔의 어머니가 자전거를 잘 타실 수 있을까? 또 다른 걱정도 있었어요. 코크렛은 소박한 곳이거든요. 태국의 작은 시골 분위기예요. 성에 차지 않으실까 봐요. 일단은 화려하고, 웅장해야죠. 그래야 본전 뽑은 느낌 드시잖아요. 시시하다며 하품하시면, 이곳은 괜히 온 게 돼 버리죠. 세 자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방콕에서 제일 좋다며 환호할 때, 약간 소름이 돋았어요. 그 정도인가요? 그렇게나 좋으세요? 작은 시장이 있고요. 진흙으로 빚은 그릇들을 팔고요. 찌들지 않고, 내세울 것도 없는 집들이 이어져요. 주택가 골목을 지나면 나무들과 열대의 이파리가 무성하고요. 그때만 기다린 바람이 뺨으로 흘러요. 어머니, 어머니는 어찌 그리 자전거를 잘 타세요? 처음엔 겁 먹으시더니요. 뼈가 나무젓가락처럼 부러지는 나이라면서요. 주저하시던 어머니가 앞으로 쭉쭉 나갈 때, 저는 주먹을 꽉 쥐었어요. 제가 더 긴장했죠. 아! 알겠어요. 왜 다들 깡충깡충 이곳에 반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작은 증문리. 어머니와 이모가 나고 자란 곳. 제가 다섯 살 때 이모의 허리를 감싸고 시골길을 달렸어요. 닮았어요. 똑 닮았어요. 그때의 시골길이 딱 이랬어요. 그때의 하늘도 이랬고, 그때의 자전거도 이랬어요. 우리가 만든 기적을 자축해요 모든 일과가 끝나면 망고스틴을 가운데 놓고 열심히 까먹어요. 두툼한 껍질 속에 눈처럼 흰 과육이 신비롭죠? 맛은 더 신비로워요. 4kg에 100밧이에요. 3,500원이요. 태국이 왜 천국인지 아시겠죠? 아무도 그러라고 안 했지만, 속 깊은 이야기들이 나와요. 쉬운 삶이 어디 있겠어요? 애들 키우느라, 시부모님 눈치 보느라, 먹고 살려고 이마트에서 종일 바코드를 찍느라 힘들었대요. 아이들이 잘 커서, 먹고 살만해져서, 여기가 방콕이어서 행복하대요. 공간이 바뀌었을 뿐인데요. 왜, 한국에서는 나누지 못했던 말들이 터져 나올까요? 여행의 힘일까요? 일상이 통째로 바뀌었어요. 아침은 토스트에 잼을 바르고, 점심엔 마사지를 받죠. 밤이면 얼음 탄 맥주를 마시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망고스틴을 까먹어요. 피부가 조금 더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 사람들이 친절해져요. 주목받는 삶은 남의 것인 줄만 아셨죠? 누군가를 알아주고, 떠받드는데 더 익숙하셨죠? 시간이 너무 빠른가요? 월급날은 그렇게 안 오더니요. 우리, 축제처럼 살아요. 어딘가를 가야 더 행복하다면 열심히 다니기로 해요. 우리의 다음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시간은 폭풍처럼 사라지니까요. 서두를수록 좋아요. 이제 얼음 없는 맥주는 싫으세요? 자, 오늘이 마지막 밤이에요. 건배해요. 아무도 아프지 않고, 아무도 외롭지 않은 여행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기적이라 생각하자고요. 우리가 만든 기적이에요.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는 기적이에요. 글│박민우사진│박민우 artravel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