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여행과 그들의 삶 사이에

영화와 여행과 그들의 삶 사이에 시리아 | 글·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 Prologue 시리아를 그리워하게 된 것은 '압둘 와합'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어느 국제평화단체에서 이슬람 세계에 대해 공부하는 작은 그룹의 월례모임 자리였다. 나는 참여한지 두어 번밖에 되지 않아 여전히 생소한 모임이었는데, 그날은 시리아 내전의 현황을 톺아보기 위해서 시리아인 유학생을 초청한 날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 거뭇한 피부에 짙은 눈썹을 가진 시리아인 청년이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의 비극적인 상황을 들려주었다. 그가 압둘 와합이었다. 그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비교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십 년 전 서울로 유학을 왔었다. 시리아인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사이 시리아에서는 아랍의 봄에 따른 민주화 항쟁에 이어 내전이 일어났다. 멀고 먼 타향에 있었지만 가만있을 수 없었던 압둘은 마음 맞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헬프 시리아(Help Syria)'라는 작은 NGO 단체를 만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일시적인 단체가 될 줄 알았다고 했다. 압둘도, 중동 정세에 관심을 둔 한국인 친구들도, 언론도, 모두가 내전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 몰랐으니까. 나는 오래전 시리아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지금이야 매일 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아비규환의 땅이지만, 내가 여행할 당시만 해도 시리아는 세상에 둘도 없는 평화로운 나라였다. 영화에 청춘을 바쳤지만, 돌아온 건 이따위 저질 같은 인생이라니 압둘이 한국으로 유학 오던 십 년 전, 나는 한국을 떠났다. 당시의 나는 촬영감독이 되고 싶어 영화판에 몸담고 있었다. 영화를 너무 좋아했기에 덤빈 일이었는데, 영화 일이란 게 말도 못 할 정도로 퍽퍽해 몸과 마음이 한없이 지쳤다. 고용불안이 심한 직종이어서 일 없이 놀 때가 많았고, 종종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면서 어영부영 나이 서른이 되어버렸다. 인생을 죽 돌아보니 성취한 것은 하나도 없이 그저 궁핍하기만 한 삶이었다. 미래는 더더욱 불투명했다. 영화에 청춘을 바쳤지만, 돌아온 건 이따위 저질 같은 인생이라니. 울화가 치밀었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먼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 긴 여행을 다녀오자. 가서 내 삶을 회복하는 시간을 좀 가지자. 여행을 위한 짐을 꾸렸다. 얼마간의 옷가지와 아끼던 책 몇 권만 고향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세간은 죄다 버리고 팔았다. 그렇게 나는 서울에서의 고단했던 생활을 정리하고 아라비아 반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라비아 반도는 나에게 남미나 아프리카보다 더 낯설고 먼 곳이었으니까. 삶을 회복하기 위한 긴 여행의 첫 번째 나라가 시리아였다. 한국을 떠난 비행기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나를 내려주었다. 터키는 관심사가 아니었으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리아로 가는 국제버스에 올라탔다. 30시간을 달려 국경에 도착했고 비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국경 사무소 한쪽에서는 정장을 잘 차려입은 북한 사람들 몇 명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시리아는 한국과 수교가 없고 북한과 수교가 있는 나라였다. 소위 말하는 였다. 한국에 시리아 대사관이 없는 것은 물론이었고, 양국 사이에는 비자와 관련된 협정도 없었다. 시리아를 여행했다는 사람도 잘 없었다. 실체를 확인할 길 없는 풍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도착비자 발급을 거부당해 터키로 되돌아갔고, 어떤 사람은 별일 없이 잘 받았다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내 차례가 되자 이민국 직원과 간단한 문답이 오갔다. 입국 목적은? 그냥 여행 왔어요. 국적은? 코리아입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너무나도 간단하게 비자 스티커를 뚝딱 붙이고 도장을 쾅쾅 찍어 여권을 돌려주었다. 당신이 북쪽에서 왔건, 남쪽에서 왔건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어쩌면 그는 한국과 북한의 차이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미지의 나라 시리아의 베일을 들추고 발을 들이는데 성공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멀어져가는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장을 풀기 위해 국경에서 가까운 도시 '알레포'로 향했다. 도시에 진입하자 한없이 퇴락한 풍경이 멀리서 여행 온 나를 맞이했다. 서울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오래된 것들로 가득한 낙후된 도시였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다음으로 융성한 도시라고 했는데 말이다. 하마, 홈스, 다마스커스를 거쳐 요르단 국경을 넘을 때까지 시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그러한 풍경은 이어졌다. 지은 지 몇 백 년 된 잿빛 건물이 예사로 널려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랍의 전통 복장을 하고 있거나 현대적인 복장이라 해도 무채색의 남루한 옷차림이기 마련이었다. 오랜 전통을 고수하려는 검소한 국민성과 사회주의 체제의 그늘이 뒤엉킨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리아의 인상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었다. 시리아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에게 있었으니까. 오히려 퇴락한 도시의 풍경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사람들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가만히 길만 걸어도 생면부지의 시리아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일이 흔했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보면, 그저 자기가 홍차를 마시던 중이었으니 차 한 잔 마시고, 쿠키 한 조각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홍차를 좋아해 곳곳에 찻집이 많았고 길가에서도 흔하게 홍차를 팔았다. 이 사람이 왜 나에게 차를 대접하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어리둥절해서 차를 마시다 보면 자기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먹자는 초대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길에서 만난 게 인연의 전부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방금 마신 찻값을 치르려고 해도 돈을 받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 자본주의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빵이나 오렌지를 사기위해 가격을 물어보면 한두 개쯤은 그냥 먹으라며 내밀었다.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런가 싶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계산을 치르려는 시늉을 하면 그들은 한사코 손을 내 저었다. 그렇다고 나를 귀찮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내 하고 있던 일에 다시 열중했으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시리아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몇 블록을 나와 함께 걸어 목적지에 데려다 주었다. 그러고는 악수 한 번 딱 나누고는, 생색내는 법도 없이 자기 갈 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데려다 주는 것이 하도 미안해서 나중에는 꾀를 내었다. 길 가던 사람에게는 길을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에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가게를 지켜야 하니 나를 데려다 주지 못하리라. 그러나 가게 주인들도 설명이 좀 어렵다 싶으면, 아예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나를 데려다 주었다. 가끔은 택시를 불러 데려다 주기도 했었다. 나를 목적지에 내려주면 그들은 그대로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그런 경우에도 내가 택시비를 낼 수 없었다. 택시 기사가 내 돈은 아예 받지를 않았으니까. 여행의 시간이 없었다면 영화판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진작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시리아는 온 거리가 이방인에 대한 환대로 넘쳐났다. 영어를 쓰는 시리아 청년을 만나게 되어 물었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왜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이토록 친절을 베푸는 거냐고, 바라는 것도 없으면서. 청년은 내가 시리아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자신들의 '손님'이기 때문에 잘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또한 내가 집을 떠나 먼 이국에서 불편을 겪을지도 모르는 '약자'이기 때문에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저 어려서부터 그런 가르침을 받아왔다고 했다. 시리아 사람들은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의 가식도 흑심도 없는 순수한 미소였다. 경제적으론 궁핍할진 몰라도 삶에는 여유가 넘쳐났다. 하루에도 여러번 가까운 사람들과 홍차를 마시거나 물담배를 피우며 망중한을 즐겼고, 하루에 다섯 번 알라께 기도드리는 것 또한 열심이었다. 어쩌면 이들은 자본주의와 경쟁 사회에 찌든 나의 사유체계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들의 친절은 여태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인간의 원형을 잘 보여주었으니까. 시리아에서 시작한 여행은 요르단, 예멘, 오만, 이란 등 중동 전역을 여행하고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까지 모든 아시아를 두루두루 섭렵하는 긴 여행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영화를 무척 많이 보았다. 가지고 있던 영화 파일을 다 보면 본 영화를 또 보았고,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면 그들이 가진 영화 파일을 얻어서 보았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선택한 일이었는데, 바쁘기도 하거니와 항상 심적으로 지쳐 있어서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었다. 여행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지울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주었고, 그것은 곧 삶의 회복과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귀환했다. 따로 귀국 시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여행이었다. 어느날 문득 이제는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영화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촬영감독이 되었다. 여행의 시간이 없었다면 영화판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진작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영화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매개였다. 그리고 여행은, 영화로 만난 세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몸에 새기는 일이었다. 청춘을 영화에 바쳤고 가끔 여행에게 외도하는 낙으로 살아왔다. 영화를 만나게 되면서 세상과 타인의 삶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영화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매개였다. 그리고 여행은, 영화로 만난 세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몸에 새기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레오 까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면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동경하게 되고, 파리를 여행하기를 꿈꾸었다. 나중에 실제로 파리를 여행하면서는 영화의 배경이었던 '퐁네프 다리'를 거닐며 다시 영화를 추억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향기」를 보면서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웠고, 또한 이란을 여행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이란을 여행하면서는 이란의 청년들과 영화를 이야기하며 친구가 되어갔다. 나에게 삶이란, 영화와 여행이라는 두 개의 바퀴가 끊임없이 굴러가는 일이었다. 때로는 여행했던 곳을 그리워하며 영화를 틀기도 한다. '압둘 와합'을 만났던 날이 그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10년 전 시리아 여행의 사진들을 들추어 보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여행자를 환대해 주던 시리아 사람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웠고 안부가 궁금했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친구들의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시리아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 이란 등 주변국가들의 이권 쟁탈에 희생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 날 밤 다큐멘터리 영화 「시리아의 비가」, 「화이트 헬맷」 두 편을 연달아 보았다.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다룬 작품이었다. 시리아 사람들에게 닥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현실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평화롭기만 하던 시리아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무차별적인 폭격이 일어나는 생지옥으로 변해있었다. 무너진 건물 속에서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어갔고 고문과 참수가 횡횡했다. 9년째 접어든 내전 속에서 시리아는 희망 없이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도저히 마저 볼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으며 멈춤 버튼을 눌러야 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기에 용기를 내어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보아야 했다. 괴로워도 직면해야 하는 현실이니까. 지금 시리아에 필요한 것은 관심과 기적이니까. Epilogue 압둘을 다시 만난 건, 지난 연말에 있었던 시리아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였다. 그는 행사장에 딸린 주방에서 시리아 음식을 만들던 중에 뛰쳐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의 밝고 환한 미소는 영락없는 시리아 사람의 그것이었다. 안부를 물었더니, 곧 시리아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했다. '헬프 시리아'가 그동안 한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구호 물품을 사서 난민 캠프에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압둘의 표정이 계속 밝지만은 않았다. 사정을 캐물으니, 모금 사정이 좋지만은 않아서였다. 이번에 다녀오면 언제 다시 갈 수 있을 만큼의 모금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떠나기 전까지 한 푼이라도 더 모금을 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닌다고 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 그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나도 시리아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들이 먼저 나를 '손님'으로 격상시켜주었고 '약자'인 나를 보살피며 환대를 베풀어 주었으니까. 그것은 내가 여행자였을 때 진 빚이었다. 이제는 시리아 사람들이 '약자'가 되었으니 내가 갚을 차례였다. 그리고 압둘은 한국에 온 우리의 '손님'이니 그를 보살피고 도와야 했다. 나는 압둘을 따라서 시리아에 다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그곳은 시리아가 아니라 주변국과의 국경에 있는 난민 캠프겠지만, 시리아 사람들이 있는 곧 시리아 아니겠는가. 가서 압둘의 일을 도울 것이다. 내가 같이 간다고 해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유도 없이, 죄도 없이, 하루아침에 '약자'가 되어버린 시리아 친구들의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며 위로해줄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10년 전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환대를 베풀어준 그들에게, 나는 빚을 갚으러 갈 것이다. 글│박 로드리고 세희사진│박 로드리고 세희 artravel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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