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청춘이 끝나버렸다고

이제 청춘이 끝나버렸다고캐나다 | 로키 | 글 · 정민아 | 사진 · 오재철 청춘이 끝났다. 미쳤다고 했다. 요즘이야 세계 여행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 있지만 우리가 신혼여행을 1년간 떠난다고 했을 때, 그때 주변에선 모두가 미쳤다고 말했다. 수많은 미친 이유를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났고, 1년 후 무사히 돌아왔다. 사람들은 대단하다 했지만, 꼬리말을 붙였다. "아이가 없으니 가능한 일이야!" 아이가 태어나면 끝이라고 했다. 이젠 너희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도 끝이라고.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들어본 적도 없는 생소한 근육암. 크기는 무려 7cm였다. 종양의 크기와 발병 시기로 가늠했을 때 3기에 해당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눈물이 났다. 2세 계획은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술 날 아침 직감이 일었다. 병원 화장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5,000원짜리 임신 테스트기로 확인한 결과 뱃속에 아이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 보다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먼저 고개를 드밀었다. 수술이 끝난 후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세요?" 아주 특이한 경우라고 했다. 발병 기간과 암의 크기에 비해 병의 심각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악성도'가 매우 낮다 했다. 수술하고 보니 0.5기가 될까 말까한 정도였다고. 수술은 무사히 마쳤고, 열 달 뒤 아이가 태어났다. 너의 이름은, Aran 아란(Aran) 군도라는 곳이 있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곳. 그러나 언젠가 가게 될 곳. '아란'이라는 글자의 형태도, 동그랗게 울려 퍼지는 음절도 마음에 들었다. 딸의 이름은 아란이 되었다. 아란은 강원도 어느 캠핑장에서 백일을 맞이했고, 그 후로도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 아빠와 함께 국내 이곳 저곳을 여행했다. 그리고 태어난 지 600일이 되던 날. 마침내 우리 부부는 아란이를 데리고 캐나다의 겨울 한복판으로 떠나보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캐나다 로키 산맥을 마지막으로 신혼 여행을 마친 지 딱 1,000일 만이었다. 다시 찾은 로키는 인생의 큰 획을 그은 일련의 사건들이 무색하리만치 떠나오던 그날의 공기,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한국으로 갔다가 금세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평생에 비하면 3년이라는 일상은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거기에 소복소복 쌓인 하얀 눈은 끊어진 시간과 시간을 감쪽같이 잘도 이어주었다. 이번 여행은 아란이에 더해 친정 부모님이 함께였다. 아이의 낮잠 시간을 고려한 동선과 부모님의 매 끼니 식사 메뉴까지, 그야말로 3대 모두를 위해 심사숙고하여 짠 일정이니만큼 계획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예약한 호텔들의 위치와 비상 시 행동 요령, 대사관 연락처 등이 꼼꼼하게 정리된 일정표를 건네 받은 부모님의 얼굴에도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 번졌다. 600일된 아이와 떠난 첫 해외 여행, 다녀와서 큰소리 뻥뻥 칠 생각이었다. 세계 여행자답게 아이와의 여행도 별거 아니었노라 신나게 무용담을 늘어놓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준비한 많은 것들, 분 단위로 꼼꼼하게 짠 계획들은 실상 철저히 내 중심에서 비롯된 허황된 바람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에게 시차 적응을 기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 9시, 그러니까 현지 시간으로는 새벽 2시에 잠을 깨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낮잠 시간을 고려한 동선 따위는 무의미했다. 한밤중에 일어나 '맘마'를 먹고, 아침이 올 때까지 호텔 방에서 신나게 뛰어 노는 아이로 인해 엉클어지기 시작한 계획은 여행 중반, 급기야 일정표를 박박 찢어버리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여행 닷새째, 그날은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타고 재스퍼를 떠나 밴프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며칠째 잠을 설친 어른 넷의 얼굴엔 검푸른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지만 재스퍼의 하늘만큼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쾌청했다. '드디어 로키 산맥의 진면목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들떴다. 로키 산맥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산악 경관을 자랑하는 이 아이스필즈 파크웨이 드라이브 코스는 그야말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어? 길을 잘못 든 거 아냐?""그럴 리 없어. 재스퍼와 밴프를 잇는 길은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 당황한 남편의 목소리가 닿은 곳엔 'Closed'라고 적힌 커다란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방금 전 지나쳐 온 재스퍼 인포메이션 센터로 부랴부랴 전화를 걸었다. "지난밤 내린 폭설 때문에 제설 작업을 해야 해요. 강풍이 부는 구간이 있어 언제 작업이 마무리될 지는 알 수 없어요." 날이 이렇게 맑은데 강풍이라니? 로키 산맥의 산세가 험하다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은 단 열흘. 마냥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가족 회의 끝에 밴프로 가는 걸 포기하고, 예약했던 호텔들도 모두 취소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허름한 모텔로 들어섰다. 전자레인지가 없어 즉석밥을 데워 먹을 수도 없는 상황. 부모님을 위한 매끼 식사 메뉴 또한 무의미해졌다. 완벽했던 계획은 이제 완벽하게 엉망이 되었다. 내일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될지, 잠시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오히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실 짜여진 일정에 맞춰 움직이려니 갑갑한 마음이 들려던 참이었다. 계획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그날 하루 제대로 여행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 찰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며 오히려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진짜 여행 이튿날 아침, 남편과 나는 조금 바삐 움직였다. 새로 찾은 인터넷 내용을 바탕으로 현지에서 정보를 보강했다. 동네의 자그마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주인에게 이것저것 말을 건넸다. 웰스 그레이 주립공원. 계획엔 없던 곳이다. 어젯밤 처음 알게 된 장소였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길의 양쪽에는 무릎 높이부터 시작해 어른 키만큼 쌓인 눈들이 가득했다. 도저히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어 보였지만 카페 주인에게 알아온 정보대로 우리는 발자국이 난 오솔길을 찾기 시작했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니아로 들어가는 옷장의 비밀 통로를 모르면 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듯이 비밀 오솔길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면 포기하고 되돌아왔을 뻔한... 그랬다, 정말 그곳에 길이 있었다. 들어가는 발자국과 나오는 발자국이 총총히 찍혀있는 새하얀 오솔길. 남편을 선두로 아란이를 등에 멘 나, 부모님은 일렬종대 비장하게 눈의 숲으로 조금씩 미끄러져 들어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은 헝클어진 계획으로 심란해진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식혀주었다. 눈밭에 파묻혀(사실 남들이 밟아 놓은 길을 가는 거라 그리 힘들진 않았다.) 10여 분쯤 걸어 들어가자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 펼쳐졌다. 우리 중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도 하지 못한 광경. 산세로 따지면 남미의 이과수 폭포나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기이하고도 웅장한 풍경이었다. 겉면이 얼어버린 폭포 안쪽으로 얼지 않은 물줄기가 세차게 떨어졌다. 포토그래퍼인 남편도 카메라를 내려놓은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이곳이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 이토록 멋진 자연이 사진에 다 담기지가 않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우리는 더 이상 미리 알아본 맛집을 '찾아가기' 위해 헤매지 않았다. 거리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음식점에 들어가 각자가 좋아하는 메뉴를 골라 시켰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추천하는 여행지를 즐겼다. 또, 어떤 도로를 선택하더라도 이번 여행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 아찔한 풍경들이 펼쳐졌기 때문에 구겨 버린 계획표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남지 않게 되었다. 오늘 하루 무엇을 보게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알지 못하는 길 위해서 오히려 가슴은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여전히 파닥이는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남편과 나, 아란은 여행을 이어갔다. 신혼여행의 종착지이자 가족 여행의 새로운 시작점이었던 아이스필즈 파크웨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봉우리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가 문제였다. 매 순간 달라지는 그날의 날씨에 따라 길 위에 오를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기에 230km를 잇는 출발선에 서자 다시 긴장이 몰려왔다. 이미 며칠 전,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다행히 재도전한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는 우리를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운전하는 남편을 시작으로 나, 심지어 차만 타면 짜증을 내던 아란이 마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훤한 이마에서 이어지는 까만 눈썹, 눈썹을 지나면 나오는 매끈한 눈두덩이, 그 아래로 하늘을 향해 바싹 치솟은 속눈썹, 오똑한 콧날과 인중을 지나 두 개의 산봉우리 같은 입술을 지나면 날렵한 턱선으로 이어진다. 아이의 옆모습과 로키의 유려한 산맥이 교차 되었다.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자연 로키를 고작 아이의 작은 얼굴에 비유하다니 좀 의아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와 로키 산맥. 백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경이로운 그 모습이 닮아 있다. 한겨울 로키의 신비로운 풍경을 찍기 위해 자동차를 멈추면, 세상에는 오직 저 위대한 산과 남편과 나, 아란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먹먹하고 깊은 고요를 메우는 건 바람, 구름, 그리고 새하얀 눈보라. 휘날리는 대지의 숨소리뿐이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가 태어나면 청춘은 끝난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살아 보니 다수의 의견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캐나다의 겨울 속으로 떠났다. 신혼 여행이 끝났던 그곳에서부터 길을 이어나가고자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청춘이 끝난다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로키 산맥의 새하얀 눈밭 위 아이와 손을 잡고 새 발걸음을 새겨 넣는다.사람들의 말이 쌓여 이루어진 길이 아니라 내가 직접 밟아가는 길이다. 가슴이 뛴다. 아이가 태어나고 여전히 길 위에서 파닥거리는 심장으로, 우리는 아직 청춘이었다. 글│정민아사진│오재철 artravel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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